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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Sep 03. 2020

SF소설에서, 살아갈 방향에 대한 질문을 받다

열여덟 번째 시간-『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김초엽)

뻔한 이력의 작가가 아니었다. 화학과를 졸업하고 생화학 석사 학위를 받은 작가의 작품이었다. 무려 첫 작품집!


7개의 중단편 소설(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스펙트럼, 공생 가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감정의 물성, 관내분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로 이루어진 이 소설집은 그중 두 작품(관내분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한국과학문학상을 수상했을 만큼 소설의 완성도와 흥미도가 어느 정도는 보장된 작품이었다.


낯선 과학 기술들을 소재로 삼았지만, 이야기의 본질은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들을 다룬 소설로 과학을 전혀 모르는 나에게도 충분히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인간 배아 기술, 유전자 조작, 우주 정거장, 외계 생명체, 지구 외의 다른 행성으로의 이주, 냉동 수면 기술, 우주 바깥의 새로운 우주 등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보았을 법한 소재들을 실제 과학 기술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소설화 한 작가의 발상은 탁월했다. 얼마나 연구가 진행되었고, 앞으로의 연구 방향이 어떤지 전혀 알 수 없는 나로서는 어디까지가 상상이고 어디까지가 실현 가능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작가의 발상을 따라가다 보면 그 세상이 그리 먼 곳에 있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는 내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것은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여러 문제들이 그토록 과학 기술이 발달한 미래의 어느 지점에도 그대로 존재한다는 상상 때문이었다. 소설 속 세계는 외계를 오가고, 냉동 수면 상태로 몇십 년을 버틸 수 있고, 죽은 사람을 ‘마인드’라는 데이터로 만들어 보관하면서 언제든 생생하게 다시 만날 수 있으며, 개인 우주선으로 우주 정거장을 오갈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여전히 나와 다른 타인을 차별하고, 도시의 중심과 외곽에 사는 사람을 분리하며, 여자는 임신과 동시에 중요 업무에서 배제되고, 헤어진 가족과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되고, 미혼모에 나이 많은 여성에게는 어떠한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도리어 역차별로 보이는 현상들이 그대로 존재하는 세계이기도 했다.


안타까움과 동시에 그러니 현재의 우리는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지금 인간이 겪고 있는 여러 문제들이 과학 기술이 발달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들은 아님을, 과학 기술의 발달과는 별개로 인간은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하고, 그답을 찾기 위해 인문학적 사고를 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여러 단편 중 가장 마음에 남았던 단편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와 「관내분실」이었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인간 배아 기술의 발달로 자궁이 아닌 기계에서 유전자를 조작하여 최상의 유전자들로만 배합한 인간들이 태어나는 세상이 온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그런 식으로 태어나는 세상은 아니기에 여전히 인종이 다르고, 장애가 있으며 유전적 질환을 앓는 사람들도 공존한다. 결국 도시의 중심에는 유전자 배합으로 태어난 인간들(개조인)이, 외곽에는 그렇지 못한 인간들(비개조인)이 살아가게 된다. 철저한 분리주의가 실현된 것이다.

인간 배아 기술의 선두에 있던 ‘릴리’라는 인물은 스스로가 유전질환으로 얼굴에 얼룩을 가진 채 태어나 차별받으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훗날 그는 자신의 유전자로 만든 배아에 자신의 질병이 유전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차마 그 배아를 폐기하지 못한다. 대신 지구 바깥에서 자신의 아이가 차별받지 않고 살아갈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그 세계에서는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 그 세계에서 태어난(자궁이 아니라 기계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성인이 되는 해에 시초지라 불리는 ‘지구’로 순례를 떠나게 되는데, 그곳에서 생애 처음으로 차별적 시선을 마주한다. 하지만 자신들이 살아온 행성에서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사랑’의 감정도 느끼게 된다.

순례를 떠난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보호와 평화가 보장되었지만 서로를 사랑할 줄 모르는 자신들의 행성이 아닌, 끔찍하고 외롭고 쓸쓸한 풍경을 지녔지만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는 지구에 남기로 한 순례자들의 자발적 선택이었다.   


이 소설은 유전자 조작과 인간 배아 기술에 대한 윤리적 문제를 생각해볼거리로 던져 주었다. 릴리가 자신의 유전적 질환이 배아에게 유전된 것을 알고도 폐기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태어날 가치를 부여하고 또 빼앗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에게 그런 선택권은 부여되지 않았으므로.     


하지만 내게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 것은 소수자들에 대한 다수자들의 태도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는 얼굴에 흉측한 얼룩을 가지고 태어나도, 질병이 있어도, 팔 하나가 없어도 불행하지 않은 세계를 찾아내고 싶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세계를 나에게, 그녀 자신의 분신에게 주고 싶었을 것이다. 아름답고 뛰어난 지성을 가진 신인류가 아니라, 서로를 밟고 그 위에 서지 않는 신인류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아이들로만 구성된 세계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중략)

마을에서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결코 배제하지 않았다. (49쪽)     


‘서로의 존재를 배제하지 않았다’는 문장이 마음에 쿵하고 내려앉았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모습의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느끼곤 한다. 자신과 다른 외형을 가져서, 조금은 낯선 모습이라서…… 결코 배제의 이유가 될 수 없는 것들로 타인의 존재 자체를 배제해버리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지금까지 나는 내게 부여되지도 않은 권리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은 배제해 왔던가? 과연 나는 그런 적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부끄러웠다.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보고 거부반응을 보이며 도망치는 것만이, 그들을 나와 다르니 함께 살아갈 수 없다고 단언하는 것만이 배제가 아니었다. 그들을 '불쌍하다, 가엾다' 느끼는 것 또한 배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 자체가 그들과 나는 다르며, 내가 그들보다 낫다는 전제가 깔린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나 나나 그저 자신의 생을 치열하게 사는 한 인간일 뿐인 것을, 감히 내가 뭐라고 그런 생각을 해왔던가 싶어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순례자들은 누구를 사랑했을까. 그들은 남미에, 서부 미국에, 인도에, 모두 흩어져서 살겠지. 그들은 아주 다채로운 모습으로 여러 방식의 삶을 살겠지. 하지만 그들이 어떤 모습이건 순례자들은 그들에게서 단 하나의, 사랑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를 찾아냈겠지.

그리고 그들이 맞서는 세계를 보겠지. 우리의 원죄, 우리를 너무 사랑했던 릴 리가 만든 또 다른 세계. 가장 아름다운 마을과 가장 비참했던 시초지의 간극. 그 세계를 바꾸지 않는다면 누군가와 함께 완전한 행복을 찾을 수도 없으리라는 사실을 순례자들은 알게 되겠지.

지구에 남는 이유는 단 한 사람으로 충분했을 거야.  (53쪽)



지구로 떠난 순례자들은 자신의 행성에서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차별과 억압을 경험한다. 그 과정에서 처음으로 상실감, 불행, 고독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것을 모두 견뎌낼 만한 강렬한 사랑을 경험하면서 결국 순례에서 돌아오지 않고 지구에 남는 것을 선택한다.


정말 그럴 수 있는 걸까? 모든 차별과 억압, 불행, 고독을 견딜 만큼 사랑의 힘은 강력한 걸까? 잠깐 의문스럽기는 했다. 하지만 이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건, 마지막 문장 때문이었다.


‘남는 이유는 단 한 사람으로 충분했을 거야’라는 문장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인간이든 괴롭고 고통스러운 삶의 순간이 있다. 지구 아닌 어느 별로 도망치고 싶은 순간. 아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은 순간이 살면서 한두 번은 꼭 있다. 그 순간을 무사히 이겨낼 수 있는 것은 결국 ‘단 한 사람’의 힘이다.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나에게 보내는 전폭적인 지지, 내가 누군가에게 보내는 진심 어린 응원, 그것 하나만으로도 내가 살 수도 남을 살릴 수도 있었다. 결국 '단 한 사람'의 힘은 위대한 것이었다.

      

소설의 끝자락에서 되물어보았다.

나에게 그 단 한 사람은 누구일까? 나의 부족함을 모두 감싸 안아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그저 사랑해줄 단 한 사람. 그리고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단 한 사람일까? 나를 그렇게 여기는 누군가가 세상 어딘가 존재할까?      






「관내분실」은 사후 마인드 업로딩이라는 기술을 소재로 한 소설이었다. 사후 마인드 업로딩이란 사람이 죽은 뒤 무덤에 묻히거나 납골당에 안치되는 것이 아니라 도서관에 ‘마인드’라는 이름으로 데이터화 되어 보관되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마인드는 수십 조 개가 넘는 뇌의 시냅스 연결 패턴을 스캔하고 마인드 시뮬레이션을 돌려 구현된 결과물이다. 마인드 업로딩 시스템이 보편화된 세계에서는 죽은 이의 지인들은 언제든 근처 도서관에 가서 죽은 이를 가상현실과 비슷한 방식으로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만날 수 있게 된다.


'지민'은 생전에 산후우울증의 연장으로 평생을 우울증 환자로 살다 끝내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한 엄마의 마인드를 수년만에 처음으로 찾아간다. 생전의 엄마는 지민에게 병적으로 집착했고, 지민은 그런 엄마에게 어떠한 연민조차 없었기에 엄마의 죽음을 통보받고도 외국에서 돌아오지도 않았던 터였다. 그러다 자신이 생각하지 않던 때에 임신을 하게 되고 주요 업무에서 배려 차원의 배제를 당하게 되면서 엄마라는 자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결국 도서관에 마인드로 남은 엄마를 찾아가지만 엄마를 찾을 수 있는 인덱스가 모두 사라져서 엄마가 ‘관내분실’ 상태라는 어이없는 말을 듣게 된다.

도서관 연구부서에서는 엄마의 인덱스가 될 만한 사물을 찾아오라고 하고, 지민은 엄마에 대해서 떠올려보지만 엄마의 마인드를 불러올만한 어떤 사물도 떠오르지 않는다. 결국 엄마와 마찬가지로 인연을 끊고 살던 아빠를 찾아가고, 그곳에서 엄마가 결혼 전에 직접 디자인한 표지를 가진 잡지를 몇 권 발견한다. 엄마가 엄마가 아니었던 시절, 오로지 ‘김은하’라는 한 개인으로만 존재하던 시절의 흔적은 엄마의 마인드를 불러오는 데 성공하고, 지민은 뒤돌아선 엄마의 마인드를 향해 ‘엄마를 이해한다’는 말을 한다.      



읽는 내내 마음이 먹먹했다. 엄마가 된 나의 삶과, 이만큼 나를 키워준 엄마의 삶이 동시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엄마가 되는 순간 자의든 타의든 ‘나’라는 자리는 일정 시간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모든 시간이 아이를 중심으로 흘러가고, 모든 공간이 아이로 채워지는 경험은 충분히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었던 때에 아이를 낳았음에도 가끔씩 설명할 수 없는 우울의 세계로 나를 끌고 갔다. 그 안에서 아이에게 나의 우울감을 표현하기도 하고, 아주 가끔 원망 섞인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우리 엄마의 시간을 떠올리면, 나의 시간은 배부른 투정일 뿐이었다. 엄마는 정말 오로지 엄마로만 살았다. 고작 스물셋에 결혼을 해서 스물넷에 엄마가 된 우리 엄마, 그렇게 스물여섯에 두 아이의 엄마가 됨과 동시에 오롯이 혼자서 모든 짐을 짊어져야 했던 우리 엄마, 엄마, 엄마..


엄마는 그렇게 평생을, 정말 평생을 오직 ‘엄마’로만 살다가 겨우 엄마를 조금 내려놓고 살아 보려던 때쯤에 연세 드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딸’로 돌아가 간병인을 자처했다. 엄마에게는 아직도 엄마 자신으로 살아갈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 엄마를 떠올리니, 만약 엄마의 사후에 사후 마인드 업로딩 기술이 현실화되어 엄마를 찾는 인덱스가 필요하게 된다면 과연 무엇으로 엄마를 찾아야 하나 싶었다. 


덜컥, 무언가가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엄마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으로 좋아하고, 커피를 좋아하고, 바다가 보이는 창이 난 카페를 좋아하고, 면 요리를 좋아하고, 자식들과의 시간을 좋아하고... 그렇게 엄마가 좋아하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엄마의 마인드를 불러낼 특별한 물건이나 사진은 전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두려움이 엄습했다.

 

엄마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에게 남은 시간도 알지 못하는데 엄마에게 남은 시간을 어찌 알겠냐마는, 그래도 한 삼십 년쯤은 남지 않았을까. 아니 그쯤은 남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엄마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겠다고 다짐했다. 엄마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하실 수 있도록 부족하나마 물심양면 애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눈감는 날, ‘나는 너희들을 위해서만 살았어’라는 말은 하지 않도록, ‘뒤늦게라도 내 인생을 살아서 행복했어’라는 말을 할 수 있도록 이제는 내가 엄마를 지지하고 응원해야겠다.


더불어 나 역시도 내 자식들에게 ‘엄마가 너희 키우느라 엄마의 젊은 날을 다 쏟아부었어’라는 말은 하지 않도록, 조금 더 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야겠다. 그런 마음에서 지금 이렇게 열심히 써 내려가는 매일의 기록들이 나를 불러오는 인덱스가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과학적 소재가 가득한 SF소설을 읽었는데, 내 안에 남은 것은 신기술의 명칭도, 새로운 모습의 세상도 아니다. 이것이 ‘이야기’의 힘인가 보다. 낯선 소재들 속에서도 결국 내게 남는 것은, 살아갈 방향에 대한 질문들이다.


살면서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두 가지 질문을 받아 안은 채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마지막 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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