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일상을, 아이들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을 수 있기를
필사 노트에 8월 31일이라는 날짜를 쓰며 흠칫 놀랐다. 내일이면 9월이라니.
날씨는 여전히 더울 것이고 생활이 특별히 달라질 것도 없겠지만, 9월이 온다고 생각하니 한 계절이 가고 새로운 계절이 오는 것만 같다. 아니다. 이미 새로운 계절이 온 것도 같다. 오늘은 종일 에어컨도 선풍기도 켜지 않고 집에 있는 창문을 모조리 다 열어둔 채로 하루를 보냈다. 그래도 크게 더운 줄을 몰랐다. 바람의 결이 확실히 달라졌다.
올 초부터 시작된 코로나 사태는 겨울과 봄, 끝내는 여름까지 잠식하고야 말았다. 바람결이 세 번째 바뀔 동안에도 그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모두가 일상을 잃었고, 누군가는 직장을 잃었고, 또 누군가는 건강을, 소중한 사람을, 시간을, 여유를, 행복을 잃었다. 그러다 희망마저 잃었다. 지척에 있는 나라에서 바이러스가 전파되기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그것이 이렇게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게 현실이 되는데 불과 몇 달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이번 사태를 겪으며 많은 것을 잃었지만 딱 하나, 확실히 얻은 것이 있다. 그것은 나뿐 아니라 누구나도 다 얻었으리라 감히 확신하는 것이다. 바로 일상의 소중함이다. 아무런 의식도 하지 않고 그저 당연하게 누리던, 그래서 때론 지루하고 때론 도망치고 싶기도 했던, 저마다의 삶이다.
온 얼굴로 봄 햇살을 맞으며 출근하는 일
아이들의 손을 잡고 놀이터를 달리고 공원을 걷는 일
길가에 지천으로 핀 봄꽃을 사랑하는 이와 손잡고 거닐며 바라보는 일
버겁던 하루의 끝자락에 집 근처 호프집에 들러 동네 친구와 맥주잔을 부딪히는 일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과 반가이 인사하며 별다를 것 없는 안부를 묻는 일
주말이면 근교로 차를 몰아 당일치기 가벼운 여행을 다녀오는 일
한여름 쏟아지는 햇살을 피해 가까운 바닷가를 찾아가는 일
이마에서 턱까지 흐르는 땀을 쓰윽, 자연스럽게 닦아내는 일
시끌벅적한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커피 한 잔 마시는 일
자주 못 보던 친구를 만나 오랫동안 수다를 떠는 일
도서관 창가에 기대 책을 읽는 일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가 잔디 위에 첫 발을 내딛는 모습을 동영상에 담는 일
이른 아침 지친 몸을 일으켜 일터로, 또는 주방으로 출근하는 일
아이들을 학교로, 유치원으로, 어린이집으로 보내 놓고 집안을 대청소하는 일
오전 여덟 시 삼십 분쯤, 출근하는 직장인들과 학교 가는 아이들이 분주하게 교차되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일
그저 별다를 것 없는, 언제나 해오던 그냥 그런 일.
모조리 잃고 난 후에야 어떤 것도 그냥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지루하리만치 반복되던 하루하루는 내게 부여된 가장 큰 축복이었고, 선물이었다는 것을.
며칠 전부터 온종일 집안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며 지내던 아이들이 콧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워낙 땀을 많이 흘리는 아이들이라 에어컨을 끌 수도 없어 온도를 높였다 낮췄다 조절한다고 했는데도 그랬다. 급기야 어제 새벽에는 자다가 기침까지 하는 터라 집 근처 소아과에 다녀왔다. 알러지성 비염에, 찬바람을 많이 쐬어서 그런 거니 찬 음식을 먹이지 말고 하루 한두 번 코 세척을 해주라는 진단을 받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뜬금없이 첫째가 말했다.
“엄마, 빨리 코로나 바이러스 끝나면 좋겠어.”
맥락도 없이 툭, 던져진 그 말이 참 아팠다. 그 자그마한 아이에게서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단어가 너무나 정확하게 쏟아지는 것만으로도 아팠는데, 그 입을 막고 있는 거대한 마스크를 보니 마음이 더 저릿했다.
“그러게, 엄마도 빨리 끝나면 좋겠다.”
“그럼 이 마스크도 안 쓰고 마음대로 밖에 나갈 수 있을 텐데..”
“…….”
“친구들도 많이 만나고 놀이터에서도 마음대로 놀 수 있을 건데..”
“그래, 맞아.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만 반복해야 했다. 아이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에는 저의 일상을 돌려달라는 간절한 기도가 섞여 있었다. 그 순간, 마스크에 가려져 눈만 겨우 드러낸 채로 나를 올려다보는 네 살, 두 살 꼬맹이들의 얼굴이 말할 수 없이 가엾었다.
신을 믿지는 않지만, 누군가에게는 가닿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9월을 맞이해본다.
저희의 일상을 돌려주세요.
아이들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주세요.
사진 출처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