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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Oct 07. 2020

테드 창의 소설, 쉽지 않았지만 읽어볼 가치는 충분했다

스물네 번째 시간-『당신 인생의 이야기』(테드 창)

어렵다. 이 단어로 독서노트를 시작하고 싶지는 않지만, 정말로 어려웠다. 과학적 지식이 전무하다시피 한 내게, 과학을 토대로 쓰인 소설은 언제나 쉽지 않았지만 이번 테드 창의 소설은 정말 너무나 어려웠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8편의 단편 소설 모음집이라 이해가 되는 것은 되는대로,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 대로 읽어냈다.(읽었다는 표현보다 읽어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감사한 것은 이 책으로 독서모임을 하게 되어 파편처럼 흩어졌던 책의 내용들이 조금이나마 엮어지면서 혼자 읽을 때보다는 조금 더 이해가 되었다는 것이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바빌론의 탑’, ‘이해’, ‘영으로 나누면’, ‘네 인생의 이야기’, ‘일흔두 글자’, ‘인류 과학의 진화’, ‘지옥은 신의 부재’,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다큐멘터리’ 이렇게 여덟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이다. 각 단편의 내용을 아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내 짧은 이해로 간추린 것이라 부족하기 짝이 없다.)



바빌론의 탑 : 하늘에 가 닿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이 어떤 일을 벌일 수 있는가. 또 그 끝은 어떻게 귀결될 것인가.

이해 : 인간의 인지 수준이 과학의 발달로 인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으며, 개인에게 부여된 초월적 지능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영으로 나누면 : 자신이 믿고 있는 절대적 가치를 완벽하게 뒤엎을 만한 사실을 발견했을 때 인간은 어떤 혼란에 빠질 수 있는가.

네 인생의 이야기 : 언어와 사고가 얼마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가. 또 인간이 자신의 사고를 통해 자신의 미래를 완벽하게 알 수 있다면 어떨까.

일흔두 글자 : 사물에 붙이는 이름의 영향력이 얼마나 크며, 그 이름이 권력이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인류 과학의 진화 : 인류가 개발한 메타인류가 인류보다 더 우위에 서게 되었을 때 인류는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

지옥은 신의 부재 : 한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절망을 받아들이려는 과정과 신을 부정하던 인간이 어떻게 해서 신을 사랑하게 되는가.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다큐멘터리 : 외모 지상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외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게 하는 과학적 도구가 발명된다면 그 도구는 과연 가치 있는 것일까.     




8편의 단편 중 조금 더 깊이 있게 정리해볼 것은 ‘네 인생의 이야기’이다. 책의 제목이 바로 이 단편에서 따온 것일 만큼 이 소설집을 대표하는 소설이기도 하고, 가장 흥미 있게 읽었던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네 인생의 이야기’는 언어학자인 루이즈 뱅크스가 외계에서 온 생명체(소설에서는 헵타포드라고 명명된다)로부터 언어를 배워가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고 체계를 갖게 되는 이야기이다.      



헵타포드들은 문장을 쓸 때 어의문자를 하나씩 차례로 쓰지 않았다. 대신 개개의 어의문자에 구애받지 않고 휘갈긴 몇 개의 획을 사용해 문장을 구성해나갔다. 이런 고도의 통합 방식은 캘리그래피식 디자인, 특히 아라비아어를 쓰는 경우의 그것과 흡사했다. 그러나 그런 디자인에는 숙달된 캘리그래퍼에 의한 면밀한 사전 계획이 필요했다. 그 누구도 대화 속도에 맞춰 이토록 정교한 디자인을 자아낼 수는 없었다. 적어도 인간은 그럴 수 없었다. (198쪽)     



인간의 언어에는 어순이 있다. 언어마다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어순이 있다는 것은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머릿속에서 어떤 인과적 맥락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우리말처럼 주어 다음에 목적어가 오고 서술어가 온다거나, 영어처럼 주어 다음에 서술어가 오고 그 뒤에 목적어가 온다는 것은, 인간의 사고체계가 어떤 관계성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에 반해 헵타포드의 언어는 전체를 미리 보고 마치 그래픽 디자인을 ‘그리듯이’ 표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과 헵타포드는 사고체계마저도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물리 법칙을 생각할 때 인류는 인과적 맥락에서 생각하는 편을 선호한다. 운동에너지나 가속도처럼 인류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물리적 속성은 모두 주어진 한 시점에서 어떤 물체가 가지는 성질이다. 그리고 이런 성질은 순차적이고 인과적인 사건 해석으로 이어진다. 어떤 순간이 다음 순간을 낳고, 원인과 결과는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연쇄 반응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작용’이나 적분에 의해 정의되는 다른 것들처럼 헵타포드들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물리적 속성들은 일정한 시간이 경과해야만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목적론적인 사건 해석으로 이어진다. 사건을 일정 기간에 걸쳐 바라봄으로써 만족시켜야 할 조건, 최소화나 최대화라는 목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가장 처음과 가장 마지막의 상태를 알아야 한다. 원인이 시작되기 전에 결과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207쪽)     



헵타포드의 언어를 통해 드러난 그들의 사고체계는 ‘원인이 시작되기 전에 결과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말로 설명된다. 그들은, 우리에게는 ‘미래’라는 시간에 나타날 어떤 일의 결과를 원인이 시작되기도 전에 모두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우리처럼 어순을 가진 문장이 아닌 하나의 통합적인 그래픽 문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언어가 다르면 사고 체계도 다르다. 사고 체계가 달라서 언어가 다른 것인지, 언어가 달라서 사고체계가 다른 것인지는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에 대한 논쟁과 같다. 언어와 사고는 너무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어떤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지니게 된다. 과거에 비해 다른 언어에 대한 접근성이 매우 높은 시대이지만, 모국어가 사고체계에 가장 밀접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한 일이다. 언어와 사고의 관련성을 SF소설로 만나니 새로우면서도 아주 흥미로웠다.    

 

헵타포드의 언어를 구사하게 된 주인공 루이즈는 그들과 비슷한 사고체계를 갖게 되는데, 이로써 자신의 미래를 완벽하게 볼 수 있게 된다. 단편의 제목 ‘네 인생 이야기’에서 ‘너’는 바로 루이즈의 딸이다. 루이즈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니 잉태되지도 않은 ‘너’라는 존재를 인식하며, 그와 함께 할 자신의 미래를 완벽하게 알고 있다. 새로운 언어를 통해 이토록 놀라운 사고체계의 변화를 겪게 된다는 것은 지극히 SF 소설다웠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생각할 거리가 있었다.   


        

아무리 내가 ‘헵타포드 B’에 숙달했다고 해도, 나는 내가 진짜 헵타포드처럼 현실을 경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 마음은 인간의 순차적 언어들의 주형에 맞춰 만들어졌기에 외계인의 언어에 아무리 깊게 빠져든다고 해도 그 형태를 완전히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의 세계관은 인간과 헵타포드의 혼합물이다. (중략)
보통 ‘헵타포드B’는 단지 내 기억에만 영향을 끼친다. 나의 의식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시간 선을 따라 기어가듯이 전진하는 가느다란 담뱃불이며, 달라진 것이 있다면 기억의 재가 뒤뿐만 아니라 앞쪽에도 존재한다는 점이다. 진짜로 타오르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따금 ‘헵타포드B’가 진정한 우위를 점하면서 일별의 순간이 올 때, 나는 과거와 미래를 한꺼번에 경험한다. 나의 의식은 시간 밖에서 타다 남은 반세기 길이의 잿불이 된다. 이런 경험을 할 때 나는 세월 전체를 동시에 직감한다. 이것은 나의 남은 생애와 너의 모든 생애를 포함하는 기간이다.(223쪽)          



루이즈는 자신이 딸을 낳고, 그 딸과 어떤 일상의 순간들을 살아갈지 또 어떤 대화들을 나눌지, 딸로 인해 자신의 삶이 얼마나 빛날지 이미 다 알고 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이건 지극히 나의 입장이다) 그 딸이 스물다섯 살이라는 나이에 죽게 된다는 사실까지도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루이즈는 그 미래를 바꾸기 위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어쩌면 인생 최대의 불행을 몰고 올지도 모르는, 딸의 죽음이라는 확정적인 미래를 알고 있으면서도 루이즈는 남편과의 관계를 맺는다. ‘너’를 가지기 위해.     


대부분의 SF소설이라면, 그 미래를 어떻게든 바꾸기 위해 현재를 달리 살고자 애쓰는 주인공이 등장할 법도 한데 그렇지 않았다. 그 이유는 루이즈의 생각으로 묘사되는 서술에서 넌지시 제시되어 있었다.                    



자유의지의 존재는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는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의지란 의식의 본질적인 일부인 것이다.
아니, 정말로 그런 것일까? 미래를 아는 경험이 사람을 바꿔놓는다면? 이런 경험이 일종의 절박감을, 자기 자신이 하게 될 행동을 정확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불러일으킨다면?(210쪽)     



미래를 아는 경험이 오히려 자신의 행동에 절박감과 의무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설정이 신선했다. 미래의 불행을 안다고 해서 그것을 바꾸고자 현재를 저당 잡히는 삶보다, 현재에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을 보다 충실하게 수행하며 사는 삶이 더 가치 있는 삶이라 느껴졌다. 그렇게 살아가는 현재가 어떤 불행한 미래로 연결된다 하더라도, 현재를 절박하게, 그만큼 더 소중하게 살아내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는 메시지 같았다.

  

내게 루이즈와 같은 능력, 아니 사고체계가 생긴다면? 그래서 나의 십 년, 이십 년 후의 미래 나아가 내 아이들의 미래를 모두 알게 된다면? 그 미래에 불행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답하기에 쉽지 않은 질문들이었다. 나도 루이즈처럼 현재를 절박하게 살아낼 수 있을 것인지. 솔직히 여타의 SF소설 속 주인공처럼 어떻게든 결정된 미래를 바꾸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쪽에 더 마음이 기우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흘려보내는 현재의 시간을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너무나 아까웠다. 많은 책들이 그랬듯이 이 소설 역시 지금, 현재를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던져 주었다.


이 단편이 특히나 더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아이의 탄생과 성장의 과정을 잘 표현해낸 문장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 아름다운 문장들을 몇 개 더 소개하며, 독서노트를 마무리하려 한다.      


네가 나와 쇼핑하러 가는 것을 즐기던 것은 그리 오래 전의 얘기가 아냐. 네가 성장의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속도는 언제나 나를 놀라게 할 거야. 너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움직이는 목표를 조준하는 것과 같다. 너는 언제나 내 예상보다 앞서 나가 있을 거야.(188쪽)     

그럼 넌 또 꽥 소리를 지르고 웃기 시작할 거야. 그 소리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소리이지. 내가 분수나 샘이라도 된 듯한 기분으로 만들어주는 소리란다.(193쪽)     

재미있는 건 네가 조용하게 있을 때는 몸에서 빛을 발산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야. 만약 누군가가 그런 상태의 너를 보고 초상화를 그린다면, 나는 그 그림에 후광을 포함시키라고 주장하겠지. 그렇지만 불쾌함을 느낄 때 너는 큰소리를 발산하기 위해 만들어진 클랙슨이 되어버려. 그런 너를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화재경보기로 족할 거야.(217쪽)     

나는 어머니와 자식 사이에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유대 관계의 증거, 네가 내 뱃속에 있던 자식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고양감을 느껴. 설령 너의 모습을 직접 본 일이 없다고 해도, 나는 수많은 갓난아이들 사이에서도 단번에 너를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저쪽은 아녜요. 아, 쟤도 아닙니다. 잠깐, 저기 저 애예요.
예, 그 아이가 맞아요. 제 딸입니다.(228쪽)           




완독까지 참 어려웠던 『당신 인생의 이야기』! 그럼에도 충분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소설이었다. 『숨』을 읽었을 때도 느꼈지만 작가의 상상력과 그것을 과학적 소재로 풀어내는 필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범위였고, 내용 곳곳에 묻어나던 인문학적 사고들 또한 아주 의미 있는 것들이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툭툭 던져지는 질문들은 미처 생각해보지 않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주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선뜻 추천하기는 어려운 책이지만, SF소설을 좋아하거나 과학적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꼭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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