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상처 받고 엄마에게 위로받은 날

시로 쓰는 육아일기

by 진아

엄마의 위로


겨우 네 살 난, 어린 아들의 말에
마음 한가운데를 날카롭게 베이고
엄마 생각이 났다
살면서 서러움에 주저앉을 때면
으레 그랬던 것처럼
어김없이 엄마 생각이 났다


울먹이는 내 목소리에

엄마의 질문은 단 하나였다
그럼 몇 시에 도착해?
한 시간쯤 걸려요
엄마와 나 사이 거리가 겨우 한 시간인 걸
내 마음 쓰라린 날에야 알았다


얼룩진 얼굴을 닦아내고 엄마를 만났다
엄마는 차에 오르자마자

큼지막한 비닐팩 하나를 꺼내더니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무심히 툭, 놓았다
먹어라

아이들이 싫어해서 올해는 단 한 번도 맛보지 못했던,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감이었다

딸을 기다리는 동안

애 태웠을 엄마의 마음이

말끔히 깎인 가을빛 단감에 켜켜이 배어 있었다



바다를 보았다

숱하게 겪을 일이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엄마는 서러움에 달려온 딸에게 딱 한 마디 건네고는

탁 트인 바다를 보는 내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다



엄마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여전히 남아있던 엄마의 단감을 씹으며
그제야 미처 묻지 못한 말을 떠올렸다
엄마는 내게 날카롭게 베일 때마다 어떻게 견뎠나요
마지막 단감 한 조각을 와그작 씹는 순간
문득 엄마의 목소리가 달게 흘렀다
그거야, 네가 내 딸이기 때문이지. 그거면 충분하단다




사랑이를 훈육하는 중이었다. 소리를 지르며 떼를 쓰는 아이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이는 자신의 감정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여겼던지 점점 격해지더니 갑자기 내게 소리를 질렀다.


"엄마, 나빠! 엄마, 미워! 엄마, 죽어!"


아이는 사촌 형에게서 죽는다는 표현을 의미도 모른 채 배워서는 가끔 "엄마~나 죽을 것 같아." "죽는 게 뭐야?" 등의 말을 했었다. 그때마다 "죽는 건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는 거야"라는 설명과 함께 그 말은 쓰지 말라고 가르친 터였다. 네 살 난 아이가 "엄마 죽어"라는 표현을 썼을 때, 그 말의 의미를 곧이곧대로 들은 건 아니었다. 다만 그만큼 제가 화가 났거나 격해졌다는 것을 표현한 말이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머리와 마음은 달랐다. 날카로운 칼날이 마음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느낌이었다.


아이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데 나까지 흥분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신랑에게 아이와의 대화를 부탁했다. 시간이 흐르고 마음이 가라앉은 아이는 "엄마.." 하며 나를 불렀지만, 이상하게 내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아이에게 엄마도 네 말에 놀라고 마음이 아파서 시간이 필요하다고 미안하지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러고는 신랑에게 두 아이를 맡기고 곧장 집을 나섰다.



엄마에게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비를 찍으니 한 시간 칠 분이 나왔다. 엄마에게 다녀오면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것 같아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사랑이를 데리고 가서 말했다.


"네 마음을 몰라주어서 미안해. 하지만 엄마도 네가 엄마 나빠, 죽어 그런 말 하면 상처를 받는단다. 우리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 하지 않기로 약속할래?"


아이는 그러겠다며 약속을 했다. 아이를 안고 오늘은 엄마가 좀 길게 외출을 하겠다고, 너 때문이 아니니 걱정 말고 아빠와 동생과 시간을 보내고 있으라고 했다. 웃으며 말하는 내 모습에 안심이 되었는지 알겠다는 아이를 뒤로 한 채 다시 집을 나섰다.


친정집 앞에서 엄마를 만났다. 엄마는 타자마자 족히 대여섯 개는 깎았을 듯한 단감 봉지를 탁, 놓더니 먹으라고 했다. 내가 도착하기까지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셨을지 눈에 선했다.


엄마와 오랜만에 바다를 보러 갔다. 그동안 못다 한 얘기를 하면서도 엄마는 오늘 일에 대해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한 마디만 하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엄마 마음에 꽂은 칼날은 대체 셀 수나 있을까 싶었다.


엄마와 헤어져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잠시 잠깐 딸로 돌아가 울 엄마에게 받은 위로를 온전히 되새겼다. 그렇게 딸의 자리에서 엄마의 자리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아주었다. '그래, 앞으로 너희들이 내게 입힐 상처가 아무리 크다한들 나는 엄마의 자리에서 굳건히 버텨내리라' 다짐했다. 너희가 내 아들 딸이니,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이니.


엄마는 얼마나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았을까.
매거진의 이전글"엄마가 보고 싶으면 엄마 사진 보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