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육아휴직 4년 차이다. 첫 아이를 낳고 휴직에 들어가며 2년쯤 육아휴직을 할 계획이라고 했을 때, 주변에서는 다들 “일단 1년만 해보고 다시 얘기해. 몸이 근질거려서 나와야 할 걸?”이라고 말했다. 둘째를 연이어 낳는 바람에 휴직이 길어진 거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오래 휴직을 이어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엄마가 되기 전 나는, 내가 생각해도 참 열심히 일하는 직장인이었다. 내게 주어진 일은 물론이거니와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도맡아 가며 말 그대로 ‘열. 일.’을 했다. 업무적으로 성과도 많이 거두었고, 그만큼 주변의 인정도 받았다. 성과와 인정은 다시 내 열정의 연료가 되어서, 참 지치지도 않고 열심히 살았다.
엄마가 되고 나서, 모든 사회적 관계가 일시적으로 중단되고 오직 아이와 나 둘만 남았을 때 가끔 말할 수 없는 우울감이 밀려오곤 했다. 저만치 멀리 나아가는 예전 직장동료들의 소식을 들을 때면 조바심도 났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엄마’라는 일에 매달려 있는 일상이 아주 가끔은, 고역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어떤 단어를 가져다 써도 아이가 주는 기쁨과 행복은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이가 잠들고 나면 일시에 공허함이 밀려왔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신랑을 둔 덕에 자주 혼. 맥을 했고, 의미 없이 켜져 있는 텔레비전에 넋을 놓고 밤을 보내기도 했다. 어김없이 아침은 왔고, 정신없이 아이와 일상을 보내면서도 드문드문 지난날의 내가 너무 멀리 사라져 버린 것 같아 멍해지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때 누군가의 ‘인정’이 필요했다. 그래도 신랑이 “고생했어.”라는 한 마디를 해준 날에는 좀 나았다. 나의 수고로움을 누군가 알아준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누군가에게 “넌 충분히 좋은 엄마야”라는 말을 들은 날에는 한결 더 나았다. 정말 내가 좋은 엄마가 된 것 같은 생각에 잠시라도 기분이 좋았다. 엄마로만 살고 있는 내게 누군가가 ‘충분히 좋은 엄마’라고 말해주니 그것이 큰 보상이 된 기분이었다.
문제는 모두 그때뿐이었다는 것이다. ‘누군가’라는 타인은 내가 필요할 때, 딱딱 타이밍 맞게 나타나 나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 타이밍이 맞으면 다행이었지만, 대개는 그렇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누군가’는 말 그대로 ‘타인’이었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나는 누군가의 ‘인정’에 의해 움직인 사람이었다. 아빠 없이 혼자 힘으로 나와 동생을 키우는 엄마에게 자랑스러운 자식이 되고 싶었다.그러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쓰며 살았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엄마를 실망시킬 수 없어서,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외가 식구들을 실망시킬 수 없어서 안간힘을 다해 공부를 했다. 엄마는 늘 나를 자랑스러워했고, 외가 식구들은 만날 때마다 나를 칭찬했다. 그래서 사실, 힘들어도 힘든 줄도 잘 몰랐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운이 좋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직장생활을 했고, 그것이 내겐 큰 위안이자 기쁨이었다.
엄마가 된 나에게 돌아올 인정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인정은커녕 책임과 의무만이 잔뜩 지워졌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아이는 내가 생각한 대로 자라지 않았다. 삼시 세끼는 때마다 돌아오고 집 정리며 빨래며 육아에 따라오는 부수적인 일들은 해도 해도 표가 나지 않았다. 잠시 엉덩이 붙일 틈도 없이 아이와 놀고 집안일을 하는데도 그랬다.
자괴감이 들었다. 솔직히 그때 나는 스스로를 ‘집에서 애나 보고, 밥이나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하는 어떤 일에도 가치를 부여하지 못했다. 나와 마찬가지로 육아에 지쳐하는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아이를 키우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데?”라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아이를 보는 동안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집안을 보면서, 집안을 정리하는 동안 혼자 놀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나와 함께 신나게 놀다가 넘어져 무릎에 피가 나는 아이를 보면서, 아침과 점심의 반찬이 똑같은 아이의 식판을 보면서 때마다 죄책감을 느꼈다.
그 죄책감이라는 게 참 무서워서 한 번 정신을 파고들자 걷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나 스스로가 제일 잘 알면서도 내 수고로움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스스로에게 가혹했다. 아이가 잠들고 나면 그날 있었던 아이에게 미안한 일들이 떠올랐고, 잠든 아이의 등을 쓸며 눈물을 쏟는 일도 잦았다. 매일 쓰는 일기장엔 엄마 반성문이 가득했고, 그럴수록 자꾸만 나는 부족한 엄마, 모자란 엄마같이 느껴졌다.
돌파구를 찾는다는 심정으로 아이들이 잠든 늦은 밤이면 책을 읽기 시작했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쓰기와 읽기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나만의 시간을 통해 잊고 살던 ‘나’를 찾고 싶다는 것, 그래서 무너진 자존감을 되찾겠다는 것.
그렇게 읽고 쓰기에 매달린 지 일 년쯤 되었다. 요즘 나는 대체로 행복하고, 자주나 자신이 사랑스럽다. 엄마로서의 나를 ‘누군가’가 인정해주지 않아도 아무 상관이 없다. 내가 나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모든 개인적 커리어를 잠시 접고 두 아이의 엄마로 살고 있는 지금, 나는 참 잘 해내고 있다. 이전과 비교하면 같은 반찬을 내어놓는 횟수도 훨씬 잦고, 두 아이는 시도 때도 없이 다치고, 집안은 더 엉망진창일 때가 많지만 나는 내가 엄마로서 참 잘 살고 있다고 믿는다. 더 솔직히 말하면 믿고 싶다.
집에서 애‘나’ 보고, 밥‘이나’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집에서 애‘도’ 보고 밥‘도’ 하며 심지어 빨래‘도’ 하고, 설거지에 청소까지‘도’ 한다. 멀티플레이어도 이런 멀티플레이어가 없다. 우리 집 식탁이나 방구석구석을 보고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누군가’의 시선이니 개의치 않기로 했다. 나는 내 생을 통틀어 가장 많은 일을, 그것도 내 나름의 최선을 다해서 해내고 있다. 그거면 된 거다.
‘누군가’가 나를 인정해주고 칭찬해주기를 목 빠지게 기다릴 때에는 쉽게 찾아오지 않던 내면의 평화가 ‘나’가 나를 인정해주고 칭찬해주는 순간 일시에 찾아왔다. 어차피 내 인생인데, 내 선택이고 내게 주어진 역할을 해내는 건데 남들의 인정과 칭찬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 생각했던 건지. 나 스스로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찾고 인정하며, 그로써 내 삶에 당당해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이제부터 매일, 반성문 대신에 칭찬일기를 써야겠다. 어쩌면 여전히 엄마로서 스스로를 칭찬할 일보다 반성할 일들이 더 많은 삶일지 몰라도 애써서라도 자꾸만 칭찬거리를 찾아내 보려 한다. 엄마 칭찬 일기를 한 일 년쯤 쓰다 보면, 아이에게 미안할 일들까지도 줄어들지 모른다. 원래 칭찬이라는 게 고래도 춤추게 할 만큼 대단한 힘을 가진 거니까. 나 자신에게 자꾸 잘한다, 잘하고 있다 말해주다 보면 정말로 ‘좋은 엄마’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나를 비롯한 엄마들이 꼭, 반성문 대신에 칭찬일기를 쓰며 하루를 마무리하기를 바라본다. 일기까진 못쓰더라도 잠든 아이곁에서 그날의 반성거리가 나를 괴롭힐 때, 그래도 잘해낸 일 하나쯤 떠올리며 스스로를 다독이길 바라본다. 세상 어떤 엄마도 ‘나쁜 엄마’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모두 그 자리에서 갖은 힘을 다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 애씀은 오직 자신만 안다. 그러니 자신을 잘 다독여주기를, 자신을 있는 힘껏 칭찬해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