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이를 위해 뒤늦은 편지를 썼다

오늘까지만 정인이 얘기를 해야지. 정인아 미안해.

by 진아

아무도 모르지만 내가 아는 일


모래사장에 모래 한 알 더 얹어도

아무도 모른다

바다에 물 한 방울 더 떨어뜨려도

아무도 모른다

잔디밭에 잔디 한 포기 더 심어도

아무도 모른다

자갈밭에 작은 돌멩이 하나 더 가져다 두어도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지만

내가 안다

내가 둔 모래 한 알

내가 떨어뜨린 물 한 방울

내가 심은 잔디 한 포기

내가 가져다 둔 작은 돌멩이



내가 아는 그 사소함이

나를 바꾼다

수많은 나의 수많은 사소함이 모여

끝내는

세상을 바꾼다




오늘의 시는 평소 나답지 않은 시다. 나는 결의에 찬 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참여시 혹은 저항시라 불리는 부류의 시들을 읽기는 해도, 그것에서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다. 내 취향은 유미주의에 가까워서 아름다운 언어로 아름답게 쓴 시가 좋았다. 물론 내가 끄적이는 시는 아직까지 그리 아름답지 못하지만.

어제오늘은 그런 아름다움이 낯설게 느껴져서 시를 쓰기가 힘들었다. 새해를 맞아 매일 한 편씩 써보겠다는 다짐을 했었는데, 어제오늘은 시를 떠올리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머리와 마음에 슬픔과 분노가 한가득인데 시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정인이 사건으로 어제오늘 내내 머리가 복잡했다. 배부르게 먹는 것도, 하하호호 아이들과 신나게 노는 것도 어딘지 불편했다. 나는 이렇게 잘 먹고 잘 살고 우리 애들은 이렇게 따뜻한 집에서 따뜻한 사랑받고 잘 크는데 내가 모르는 어떤 곳에서는 또 다른 정인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 죄스러웠다. 조금 더 관심을 두어야 했는데, 외면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동학대를 다룬 기사나 프로그램을 일부러 보지 않았던 것은 보는 것 자체가 고통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냥 외면하는 것을 선택했다. 보지 않으면, 듣지 않으면 없는 일이 되었다.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그럴듯한 핑계가 되어 죄책감을 덜어주었다. 다른 아이 신경 쓸 틈에 내 아이나 잘 키우자는 생각도 있었다. 당장 두 아이와 씨름할 에너지도 부족한데, 다른 데서 고통받는 남의 아이들에게까지 마음 쓸 여력이 없었다. 그렇게 눈 닫고 귀 닫고 외면해온 시간이었다.


그 사이에 많은 아이들이 죽었고, 죽지는 않았어도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평생에 트라우마가 될 만큼 큰 고통을 받은 아이도 있었고, 끝내 장애를 갖게 된 아이도 있었다. 그래도 내 일은 아니었으니까, 덜 눈길 주고 덜 마음 쓰고 덜 아파하려고 했다.


정인이의 아팠던 모습만 보았다면 이번에도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보고야 말았다. 너무나 예쁘게 웃는 모습을. 우리 아이들 웃는 모습과 똑같았다. 너무나 선명하게 웃었다. 그렇게 예쁘게 웃던 아이가 차디찬 눈 아래 묻혀 있는 걸 보니 더 이상은 외면할 수가 없었다. 외면해서도 안 되는 거였다.


오랜만에 문구점에 들러 편지지를 샀다. 손편지를 안 쓴 지 꽤 되었는데, 꾹꾹 마음을 눌러 진정서라는 걸 썼다.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몰라서 관련 카페에 가입을 했고, 거기 나와 있는 참고 사항을 꼼꼼히 읽고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썼다.


이 편지가 재판부에 가 닿더라도 아마 판사가 읽을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도 진정서가 쏟아지고 있다니, 아마 진정서의 수를 세는 것조차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한 장 짜리 편지를 재판부에서 읽을 리는 없다. 그래도 괜찮다. 내가 그 수십, 수백, 수천 장의 편지 중에 단 한 장으로 세어지는 것만으로도 괜찮다. 그렇게 작은 힘들이 모이고 모여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만들었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괜찮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세상에 태어난 귀한 생명들이 충분히 사랑받고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자라날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희망한다. 나 한 사람의 힘은 미약하겠지만 그런 ‘나’가 모이고 모여 조금은 더 나은 세상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나의 두 아이 역시 그런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 작은 힘이라도 보탤 수 있는 어른으로 자라기를 바란다. 그렇게 애써, 힘껏 키워내고 싶다.



* 정인이 얘기는 오늘까지만 쓸게요. 더 많은 분들이 아시고 관심을 가지셨으면 하는 마음에 오늘까지만 용기 내어 쓰겠습니다. 오늘까지 충분히 아파하고 내일은 아파하는 대신 행동할 겁니다. 그게 어떤 행동이 되었든 간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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