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기분이 안 나서, 태어나 처음으로 씨름을 보았다.

내게는 그리운, 명절의 기억

by 진아

명절이다. 전혀 명절 같지 않지만, 그래도 날짜상 분명히 명절이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식구들끼리 모이지도 못하니 더 기분이 나지 않았다. 집에만 있으니 더욱 그런 것 같아서 두 아이와 잘 보지 않는 텔레비전을 틀었다.


씨름이 방송 중이었다. 태어나 처음, 내 손으로 씨름 채널에서 볼륨을 높여보았다. 허선행이라는 선수가 태백장사가 되었다. 마지막 한 판이 비디오 판독으로 결정되었는데, 허선행 선수는 자기가 졌다고 생각하다 갑자기 장사로 등극한 탓에 내내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엇비슷한 표정으로 그 장면을 보았다.


‘내가 지금 왜 이걸 보고 있는 거지’




결혼 전까지 한 해 두 번이었던 명절은 나에게, 또 우리 식구들에게 엄청난 이벤트였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탓에 삼촌과 이모네 식구들은 매 명절 우리 집을 찾았다. 엄청난 대식구가 그 좁은 집에서 어떻게 자리를 쪼개어 함께 잤는지, 우리는 모일 때마다 미스터리함을 느꼈다. 평소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나와 동생, 엄마까지 다섯이서 함께 지내기에도 비좁은 집이었다. 그런데 명절이면 큰 외삼촌네 네 식구, 작은 삼촌네 네 식구, 작은 할아버지네 식구까지 모두 어떻게 한 공간에서 먹고 자고 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현관에는 짝을 잃은 신발들이 즐비했고, 안방에 제사상을 펼쳐 밥을 먹기 시작하면 그 방에는 출입조차 힘들었다. (상을 놓고 식구들이 둘러앉으면 발을 디딜 공간이 없었다.) 밥을 2차에 나누어 먹어야 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모두가 밥을 먹고 난 뒤면 개수대에는 설거지가 정말 산처럼 쌓여 있었다. (문제는 산처럼 쌓인 설거지에 포함되지 못한 설거지가 상 위에 한가득 더 있었다는 거지만.)


그 많은 식구가 먹을 음식을 해야 했으니, 우리 집의 명절 준비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거의 한 달 전부터 할머니는 조금씩 장을 보아서 이것저것 재료를 장만해두셨다. 그때부터 냉동실에는 빈틈을 찾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대식구 음식 장만에 며느리들이 고생하는 모습은 보지 않으려 하셨다. 당신이 당하고 산 시집살이를 며느리에게 결코 대물림하지 않으려 하신 것도 있고, 일 년에 많아 봐야 두세 번 보는 며느리를 조금 어려워하셨던 것 같기도 하다.


숙모들은 매번 명절마다 미리 전화를 하셔서 제발 음식 먼저 하지 마시라고, 일찍 내려가겠다고 신신당부를 하셨지만 할머니는 말로만 그러마 대답하실 뿐 실상은 매번 똑같았다. 나 역시도 할머니가 미리 재료를 장만하실 때에는 도와드릴 것이 마땅히 없어서 그저 제발 음식 좀 작게 하시라는 말만 했다. 하지만 막상 명절 연휴 첫날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엄마는 명절 연휴에도 출근을 하셔야 했고, 동생은 어렸다.




새벽 다섯 시에 맞춰둔 알람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다섯 시에 울렸다.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싶었지만, 이미 주방에서는 덜거덕 거리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도무지 모른 체할 수가 없어서 무거운 몸을 일으켜 찬물에 세수를 했다. 추석이야 찬물 세수도 그만그만했지만 설의 찬물 세수는 정말 정신이 번쩍 들고도 남았다.


언제부터 일어나셔서 준비를 시작했는지 알 수 없었다. 할머니는 이미 주황과 노랑이 교차된 기하학적 무늬의 앞치마를 입은 채 분주히 움직이고 계셨다.


“더 자지. 와 이래 일찍 일어났노.”

“무슨, 뭐부터 할까요?”


그때부터 얼마간은 할머니와 나, 둘만의 주방이었다. 동생이 깨서 거들거나 엄마가 출근 준비로 분주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래 봐야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쯤이었던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없었다. 주로 내가 맡은 것은 전을 부치는 것이었는데, 재료는 할머니가 모두 준비해두셨기에 나는 밀가루를 묻히고, 계란물을 입혀서 구워내는 것이 전부였다.


늦은 해가 뜨고 사위가 밝아질 무렵이면, 이미 온 집안은 기름 냄새로 그득했다. 그쯤이면 출근 준비를 마친 엄마가 “우리 딸이 엄마 대신 고생하네.”라며 집을 나섰고, 동생은 내 곁에서 보조가 되어 함께 명절 음식 준비를 했다. 전을 부치며 맛본다고 한 입, 배고파서 한 입, 어쩌다 잘못 부쳐 모양이 어그러져서 한 입, 그렇게 주워 먹다 보면 아침밥도 먹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아침도 거르고 허리 한 번 펴지 못한 채, 몇 시간씩 전을 부치다 보면 온몸에서 기름이 줄줄 흐를 것만 같았다.


오전 열 시쯤 되면 내가 맡았던 전 부치기는 거의 끝이 났다. 이제 그 판에는 생선을 구워야 하는데, 생선은 뒤집을 타이밍을 놓쳐 태우거나, 뒤집다가 모양이 부스러지면 큰일이기 때문에 나도 맡을 엄두를 내지 못했고 할머니도 내게 맡기지 않으셨다. 그 시간쯤이면 멀리 사시는 숙모들도 도착을 하셔서 앞치마를 두르고 계셨기에 좁은 부엌에 내 자리가 남아 있지도 않았다. 마지막 전을 달력이 깔린 소쿠리에 가지런히 놓은 뒤 몸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어깨와 허리와 다리가 태어나 처음 펴지는 마냥 뻐근해 왔다.


할머니는 그쯤이면 미리 사두신 박카스를 한 병 주셨다. 그 박카스에 ‘우리 손녀 고생했다’ 하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담뿍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덕분에 그 맛은 무엇과도 비할 수 없이 다디달았다.


샤워를 하고 나와 안방으로 들어가며 콩나물 소쿠리를 받아 들었다. 그때부터는 텔레비전에서 방송하는 각종 명절 특집 프로그램을 보면서 콩나물을 다듬었다. 꼬리를 떼어내고, 콩나물 머리에 붙어 있는 껍질을 벗겨냈다. 한 소쿠리 가득했던 콩나물을 보며 이걸 언제 다 하나 했던 것이 무색하게, 무의식적인 손놀림은 속도를 냈다. 거기까지가 명절 음식에서 내가 해낼 몫이었다.




명절 연휴 첫날 저녁이면 비좁은 거실에 엄마, 큰외삼촌, 큰 외숙모, 작은 외삼촌, 작은 외숙모, 나와 동생, 사촌동생들까지, 열 명 가까운 식구들이 둘러앉았다. 오랜만에 만난 아들과 딸이 회포라도 풀라고 할아버지는 명절 전에 꼭 맥주며 소주를 상자째 사다 놓으셨다. 미성년자였던 나와 동생들은 음료수와 과일, 과자, 마른안주 등을 탐했고 어른들은 기분 좋게 술잔을 비웠다. 만날 때마다 반복되는 어른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꼭 동화 속 이야기처럼 따스했다. 때때로 어려운 환경에서도 열심히 자라고 있던 나와 동생에 대한 덕담과 칭찬의 말들을 해주셨는데 그것이 살아가는 데 큰 거름이 되었다.


내가 성인이 되고 난 이후부터는 삼촌들과 숙모들에게서 맥주잔을 받았다. 그 순간부터는 어른들 모두가 나를 어린애 취급하지 않으셨다. 정치와 경제, 교육에 이르기까지 별의별 주제로 다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때마다 내 생각, 내 입장도 충분히 들어주셨다. 나는 외가 어른들에게서 세상 어른들이 모두 ‘꼰대’가 아님을 배웠다.



내게 명절은 그런 날이었다. 북적이고, 와글거리고, 마시고, 취하고, 나누고, 사랑하는 그런 날.


덕분에 새벽에 일어나 기름 냄새를 겉옷처럼 입으며 전을 부치는 일도, 산처럼 쌓인 설거지를 한 번쯤 하는 일도 힘들다 생각해본 적이 없다. 집안을 가득 채운 사람 냄새와 소리가 좋았고, 그들이 내뿜는 온기를 사랑했다.


결혼을 하고 보니, 시댁에서는 차례를 지내지 않았다. 결혼 전, 우리 집에서 명절 음식을 하는 것과 시댁에서 하는 것은 천지 차이일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해볼 기회조차 없었다. 더군다나 나의 시어머님은 절대 주방에 나를 들이지 않으신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 준 건 남편이 아니라, 어머님이셨다. (시댁 자랑을 하려면 밤을 새야 할 것이다. 남편 때문에 열이 받아도 시댁 식구들을 보며, 특히 어머님을 뵈며 참는다고 하면 말을 다한 것이 아닐까.)


덕분에 명절에 기름 냄새를 맡아본 지 꽤 오래되었다. 재작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명절 차례를 큰 삼촌네로 모두 옮겨가, 친정에서도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명절 분위기를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세상이 바뀌었음을 안다. 그 시절 우리 집의 명절 풍경은 굉장히 구시대적이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음식 하며 설거지하며, 주방에 서 있던 사람들이 모두 여성이었던 것 하며…… 말할 수 없이 시대착오적이었다.)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그래도 그때의 명절이 참 그리운 것은 그 날의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일 년에 두 번 그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무언가를 먹고, 마시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그 날의 영화 같은 장면이 자꾸만 그립다. 그리움은 돌이킬 수 없음이 전제되는 순간 더욱 절실해진다. 그래서일 것이다. 아무래도 앞으로 나는 더 절절한 그리움 속에서 살아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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