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이 밀푀유 나베처럼 차곡차곡 쌓인 저녁 8시에 목욕탕에 가면 침침한 눈이 순정만화 주인공의 다이아몬드 박힌 눈망울로 바뀐다. 어깨에 얹혔던 생존과 생계의 짐은 간 데 없고 부드럽게 돌아가는 목을 되찾아 올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운 좋으면 마음의 괴로움과 영혼의 그을음까지 씻을 수 있다.
(‘온탕 애호가쯤으로 해두자’ 중)
목욕탕은 지친 마음을 쉬게 할 뿐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나 자신을 '치료'하기에 적합했다. 탕에 들어앉은 지 10분쯤 지나면 얼굴에서 땀이 흘렀다. 그럴 때 조용히 눈물을 같이 흘려도 괜찮았다. 얼굴이 좀 벌겋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사우나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보일 테니까. 목욕탕에서는 몸뿐 아니라 마음에 찌든 시커먼 때를 자연스럽게 내보낼 수가 있었다. ('목욕탕에서 살아나기' 중)
지금까지 목욕탕에 다니는 동안 나와 다른 인종과 마주친 적은 없다. 만일 금발의 여인이 내 동네 목욕탕에 들어온다면 그녀에게 쏟아지는 시선, 특히 하반신에 꽂히는 시선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나와 다른 남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지 않다. (중략)
맨몸으로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면 사회적 지위나 소유의 많고 적음 따위는 수증기처럼 흩어진다. 목욕탕에서는 몸의 나이만 두드러진다. 어린 몸, 젊은 몸, 늙은 몸. 어떤 몸이든 종국에는 늙게 되어 있다. 몸에는 인생의 자취가 새겨진다. ('어린 몸, 젊은 몸, 늙은 몸' 중)
그런데 여사님은 내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화장실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밥을 드셨다. 나 때문에 밥을 채 넘기지도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여사님이 쾌적하지 못한 곳에서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니 마치 내가 그분을 그렇게 만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요다 여사님의 세신 포스)
병든 세상을 사는 현대인은 조금씩 ‘환자’다. 병원 이름이 새겨진 환자복을 입고 출입을 통제하는 시설에 갇혀 신경을 느슨하게 만드는 약을 시간 맞춰 먹어야 하는 이들만 환자가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도 몸과 마음을 온전하게 간수하기가 쉽지 않다. ('목욕탕에서 살아나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