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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Mar 14. 2021

『데미안』(헤르만 헤세)

『데미안』을 아주 어렸을 때 읽어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 기억은 단지 ‘나는 데미안을 읽었어’라는 자기만족에서 끝났을 뿐, 주인공 ‘싱클레어’의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기억이었다. 데미안이라는 소설이 청소년 필독서였기에 그저 읽었을 뿐이다. 사실 읽었다고 말하기도 부끄럽다. 그냥 ‘보았을’ 뿐이다.  

    

서른여덟이 되어 『데미안』을 읽으니 페이지마다 밑줄이 가득하다. 어떤 페이지는 한 페이지 전체가 밑줄로 채워지기도 했다. 성장소설이지만, 성장기라 생각했던 청소년기에는 아무런 울림을 주지 못했던 이 소설이 이제 와 이토록 마음에 와 닿는다. 비로소, 이제야, 제대로 된 성장기인가 보다.      


중심인물은 ‘싱클레어’다. 싱클레어가 열 살 무렵에서 성인이 되기까지의 성장통(해설에서는 성장을 위한 ‘통과의례’라고 표현했다)을 고스란히 담았다. 싱클레어가 자신이 딛고 있는 현실과 자신이 꿈꾸는 이상 사이의 괴리 속에서 헤맬 때 그를 구도하듯 이끄는 인물이 바로 ‘데미안’이다.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대화는 십 대들의 대화라기에는 현학적인 표현들이 많다. 그래서 정작 내가 십 대였을 때는 이 책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데미안은 처음부터 싱클레어에게 ‘구원’이었다. 안전하고 평화로운 세계였던 가족의 울타리 속에 살던 싱클레어는 우연한 계기로 불안전하고 금지된 세계였던 ‘프리머’ 일행과 어울리게 된다. 별생각 없이 했던 거짓말이 부메랑이 되어 싱클레어는 끊임없이 프리머에게 돈을 갖다 바쳐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는데, 이 상황을 단번에 해결해준 것이 바로 ‘데미안’이었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이 어떤 방법으로 프리머 문제를 해결해주었는지 알지 못한 채, 그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두려움을 느낀다. 데미안에게 두려움을 느꼈던 이유는 그 역시 밝고 안정된 세계와는 다른, 또 다른 유혹자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기존의 통념들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시각을 제시해준다. 모두가 악인이라 생각하는 ‘카인’을 남달리 뛰어난 사람으로 보는 시각이라든가, 유일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든가, 회개한 도둑보다 자신의 길을 끝까지 간 도둑이 더 강한 개성을 가진 도둑일 수도 있다든가.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입장, 아니 보통 사람의 입장에서는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들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하고 그것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데미안과의 교류가 끊어진 무렵에 싱클레어는 돌이킬 수 없을 듯한 방황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끝내 데미안의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 자신에게로 가는 길을 되찾는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오르간 연주자이자 자신에게는 새로운 구원자의 역할을 한 ‘피스토리우스’를 만난다.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와의 대화를 통해 ‘나’라는 존재를 형성해 나간다. 그러나 어느 순간 피스토리우스와의 대화 속에서 그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탐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싱클레어는 그와 결별한다. 그리고 싱클레어는 다시 데미안을 본다.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다시 만나게 되고, 데미안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에게서 자신이 오랫동안 갈망해왔던 꿈속의 여인을 본다. 싱클레어는 데미안, 에바 부인, 그리고 또 다른 뛰어난 사람들과 교류하며 점차 자기 자신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간다.


그러던 어느 날 전쟁이 발발하여 데미안과 싱클레어 모두 전투에 참여하는데, 그곳에서 싱클레어는 부상을 당한다. 싱클레어는 침상에서 데미안과 다시 한번 만나게 되고, 데미안을 통해 에바 부인의 키스를 전해 받는다. 깨어나 보니 데미안은 사라졌고, 싱클레어는 드디어 자기 자신과 만난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소설의 끝이 전쟁 장면인 것에 의문이 들었다. 싱클레어라는 인물의 치열한 성장 과정을 다룬 소설의 마지막 배경을 왜 전쟁으로 삼았을까. 작품 해설을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이 소설은 헤르만 헤세가 1차 세계대전 중인 1916년에 써서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19년에 출판한 소설이었다. 전쟁은 수많은 인간의 목숨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비극이니, 헤르만 헤세는 그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의 존재에 대해 더욱 애틋하고 절실한 마음을 느꼈을 것이다. (헤세는 이 소설을 소설로만 평가받고 싶어서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가명으로 출판했다고 한다. 결과는 독일의 권위 있는 문학상의 수상자로 지목되었다고. 역시 대가는 어떻게 해도 대가인가 보다.)      


싱클레어가 ‘자신을 찾아가는 길’을 따라가며, 나 역시 끝없이 고민해야 했다. 선문답 같은 데미안의 말들 속에서 나 또한 얼마나 세상의 기준, 모두가 옳다고 하는 것들에 얽매여 살고 있는지 깨달아야 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는 『데미안』의 유명한 문장처럼, 나를 둘러싼 세계를 깨뜨릴 때만이 새가 되어 날아갈 수 있다. 하지만 세계를 깨뜨리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기보다는 말그대로 ‘투쟁’해야 하는 일이었다. 싸워야 하고, 쟁취해야 하는 것이었다.      


어린 날 싱클레어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안온한 세계에 머물고 싶었다. 별다른 모험은 없지만 밝고 안정된 세계. 그 세계를 벗어난, 어쩌면 어둡고(이 어두움은 꼭 악의 세계라기보다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더 가까운 듯하다.) 위험한 세계는 가끔 동경의 대상이 되기는 했지만 가능한 한 피하고 싶은 세계이기도 했다.      


질문하지 않았고, 의심하지 않았다. 학창 시절, 모범생까지는 아니었더라도 별 사고는 치지 않는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스스로 ‘평범’하게 사는 것이 목표라고 말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았다. 사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말하고 다녔다. ‘평범’이라는 단어가 주는 안정감에 스스로 발목을 동여매고 어떻게든 그 선을 벗어나지 않으려 애써온 삶이었다.     


겨우 작년쯤 와서야, ‘나’라는 존재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처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삼십 대 후반이 되어서야 나에게로 가는 길을 궁금해하기 시작했고, 그 길을 찾기 위해 내 안의 나와 끊임없이 대화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 『데미안』을 다시 만난 것은 운명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이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누구든 출생의 잔재, 시원(始原)의 점액과 알껍데기를 임종까지 지니고 간다.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더러는 위는 사람이고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인간이 되기를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이다.(중략)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풀이를 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다. (11쪽)     


저자가 ‘서문’이라고 밝히지는 않았지만 본문이 시작되기 전에 나오는 글이니 서문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가슴을 두드리는 글이다. 적어도 나의 삶이 개구리에,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는 삶은 아니었으면 한다. 자연의 애초 목표대로, ‘나’라는 한 인간으로 살아남고 싶다. 지금 내가 기울이는 여러 노력이 결국에는 ‘나’에게로 가닿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끝내 싱클레어가 자신의 모습을 본 것처럼.     

     



<마음에 새길 문장들>          

우리가 배우는 것들은 대부분 분명히 진실이고 올바른 것이지만, 그것들 모두를 선생님들이 보는 것과는 다르게 볼 수도 있어. 그러면 대체로 훨씬 나은 뜻을 갖게 되지. (41쪽)     

언제나 물어야 해. 언제나 의심해야 하고. 그러나 일은 아주 간단해.(중략) 그러나 그걸 수행하거나 충분히 강하게 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소망이 나 자신의 마음속에 온전히 들어 있을 때, 내 본질이 정말로 완전히 그것으로 채워져 있을 때뿐이야. 그런 경우라면, 너의 내면에서 명령하는 무언가를 네가 해 보기만 하면 그럴 때는 좋은 말에 마구를 매듯 네 온 의지를 팽팽히 펼 수 있어. (77쪽)     

지금의 이 ‘환한 세계’는 어느 정도 나 자신이 창조한 것이었다. 어머니에게로 그리고 책임 없는 아늑함 속으로 다시 도망쳐 가고 기어드는 것이 아니었다. 나 자신이 창안하고 요구한 새로운 예배, 책임과 자기 기율이 있는 예배였다. (107쪽)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122쪽)  

나는 늘 나에게 열중해 있었다. 늘 나 자신에게. (129쪽)          

자신을 남들과 비교해서는 안 돼. 자연이 자네를 박쥐로 만들어 놓았다면, 자신을 타조로 만들려고 해서는 안 돼. 더러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고 자신을 나무라지. 그런 나무람을 그만두어야 하네. 불을 들여다보고 구름을 바라보게. 예감들이 떠오르고 자네 영혼 속에서 목소리들이 말하기 시작하거든 곧바로 자신을 그 목소리에 맡기고 묻지는 마. 그것이 선생님이나 아버지 혹은 그 어떤 하느님의 마음에 들까 하고 말이야. 그런 물음이 자신을 망치는 거야. 그런 물음들 때문에 인도로 올라서고 화석이 되어 가는 거지. (145쪽)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 가지고 있지 않은 현실이란 없어.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토록 비현실적으로 사는 거지. 그들이 바깥에 있는 물상들만 현실로 생각해서 마음속에 있는 그들 자신의 세계가 전혀 발언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야. 그러면서 행복할 수는 있겠지. 그러나 일단 다른 것을 알면 그때부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을 가겠다는 선택이란 없어져 버리지. 싱클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은 쉬워. 우리의 길은 어렵고. 우리 함께 가 보세. (150쪽)     

모든 사람에게 진실한 직분이란 단 한 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사람들은 결국 시인 혹은 광인이, 예언가 혹은 범죄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것은 관심 가질 일이 아니었다. 그런 것은 궁극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 누구나 관심 가져야 할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 없이 다 살아내는 일이었다. (169쪽)     

자신의 꿈을 찾아내야 해요. 그러면 그 길이 쉬워지지요. 그러나 영원히 지속되는 꿈은 없어요. 어느 꿈이든 새 꿈으로 교체되지요. 그러니 어느 꿈에도 집착하면 안 돼요. (188쪽)

붕대를 감을 때는 아팠다. 그때부터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아팠다. 그러나 이따금 열쇠를 찾아내 완전히 나 자신 속으로 내려가면, 어두운 거울 속에 운명의 영상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내려가면 그곳에서 나는 그 검은 거울 위로 몸을 숙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그와 완전히 닮아 있었다. 그와, 나의 친구이자 인도자인 그와.(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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