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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Apr 16. 2021

『금요일엔 돌아오렴』(4.16 세월호참사시민기록위원회)

이 기록은 240여 일간 유가족들이 겪은 내밀한 이야기들이다. 기록작업은 부모들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직시하는 과정이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거기에는 세상이 반드시 바라봐야 할 삶의 진실이 있었다.

우리가 포기한 어떤 지점들을  부모들은 그대로 뛰어넘었다. 부모들은 예단하지도 속단하지도 않으면서 유연하게 세상과 마주하고 있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무릎도 꿇었다. 고통 앞에 솔직했고 자신들의 바람 앞에 명확했다. 그리고 지혜롭고 현명했다. 부모들의 이 지혜로움과 현명함은 자식을 위해 당신들의 온 마음을 낸 결과라는 걸 느낄 수 있었기에, 슬프면서도 존경스러웠다. (여는 글 중)



세월호가 바다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한 날, 그날부터 8개월간의 기록이다. 정치와 이해관계를 배제한, 오직 물아래로 잠긴 생명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목소리이다. '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 기록단'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작가진들은 이 사건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육성을 그대로 엮어 책으로 펴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다만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기억해야 할 일을 기록해야 한다는 책임을 진 것뿐이었다.

책을 읽으며 이토록 자주 멈추고 자주 울었던 적은 없었다. 소설보다 소설 같고 드라마보다 드라마 같은 현실의 이야기들을 읽어 내려가는 것이 너무 힘이 들었다.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숨 막히는 슬픔과 마주하게 되는데.. 그것이 자기 삶인 이들은 도대체 얼마나 큰 슬픔을 감당하며 살아내는 것인지..

그럼에도 반드시 읽어야 했던 이유는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슬픔을, 황망함을, 그리움을, 두려움을, 포기하지 않음을. 그 마음을.




2014년 4월 16일.
그날을 여전히 선명히 기억한다. 첫 발령지였던 도시 외곽의 한 중학교에서 3학년 아이들을 맡고 있던 때였다. 아침 자습 시간 후 왁자지껄 했던 10분의 쉬는 시간이 막 끝난 시간이었다. 1교시 수업이 없었던 나는 커피 한 잔을 타서 자리에 앉았다.


교무실은 거의 비어있었고 수업이 없던 몇 분의 선생님들이 각자의 업무를 보고 있었다.
인터넷 창에 갑자기 속보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을 태운 배가 가라앉고 있다고 했다. 배에 탄 아이들만 이백 명이 넘었다. 일시에 교무실에 앉아있던 모든 교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게 무슨 일이야?"

" 지금 속보 봤어?"


그 순간의 감정을 뭐라고 해야 할까. 여전히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다. 다들 이게 무슨 일인지 당황하며 속보를 새로고침하는 중이었다. '전원 구조'라는 속보가 올라온 순간, 우리는 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고, 다행이다. 애들이랑 샘들이 얼마나 놀랐을 거야."


그러나, 그것은 오보였다. 그날 이후로 언론에서는 정보와 오보를 마구 쏟아냈다. 그중에 무엇이 오보이고 정보인지 알 길이 없었다. 살아 돌아온 아이는 적었다. 관련 뉴스가 계속되는 얼마 동안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래서 사실상 모르는 아이들의 꿈을 자주 꿨다. 때론 내가 그 아이들이 되기도 했고, 아이들을 인솔한 교사가 되기도 했다.

그해 계획되어 있던 모든 체험학습은 취소되었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수습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벌어지지도 않을 일을 우려해 계획된 일들은 전면 취소하라는 결정이 내려왔다. 저 먼 도시의 얼굴도 모르는 형, 누나, 오빠, 언니들에게 일어난 일이었지만, 나이가 비슷해서였던지 아이들은 쉽게 감정이입을 했다. 소풍부터 졸업여행까지 줄줄이 취소되었지만, 또래들의 죽음 앞에서 아이들은 감히 아쉬워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4월은 아픈 달이 되었다. 이상하게 4월만 되면 잊고 있던 두려움이 엄습했다. 나에게도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는 일이었다. 나는 앞으로도 수십 년간 아이들과 수학여행을 떠날 것이고,  그때마다 죽음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해는 거듭 바뀌었지만 4월 16일은 매년 돌아왔다. 그맘때가 되면 교사로서, 삶을 나누는 국어교사로서 그날의 일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억해야 하고, 기억하게 하는 게 남은 이들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봐야 한 마디쯤, 잊지 말자고 말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벌써 7년이 흘렀다. 아이를 잃은 부모들도, 선생님을 잃은 아이들도,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모든 이들도, 바라는 건 단하나였다. 왜 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나. 그날, 그곳에서는 정말 무슨 일이 있었나.

명징하게 밝혀진 것은 여전히 아무것도 없다. 세월호는 세월의 무게를 지고 오늘도 자꾸만 가라앉고 있다. 이제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이자,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자주 잊고 살더라도 끝내 잊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짧은 기록을 남긴다. 그날을 기억하려는 또 한 편의 시와 함께.


난파된 교실 _ 나희덕

아이들은 수학여행 중이었다
교실에서처럼 선실에서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으라,
그 말에 아이들은 시키는 대로 앉아 있었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조립을 기다리는 나사들처럼 부품들처럼
주황색 구명복을 서로 입혀주며 기다렸다
그것이 자본주의라는 공장의 유니폼이라는 것도 모르고
물로 된 감옥에서 입게 될 수의라는 것도 모르고
아이들은 끝까지 어른들의 말을 기다렸다
움직여라, 움직여라, 움직여라
누군가 이 말이라도 해주었다면
몇 개의 문과 창문만 열어주었더라면
그 교실이 거대한 무덤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이들은 수학여행 중이었다
파도에 둥둥 떠다니는 이름표와 가방들,
산산조각 난 교실의 부유물들,
아이들에게는 저마다 아름다운 이름이 있었지만
배를 지키려는 자들에게는 한낱 무명의 목숨에 불과했다
침몰하는 배를 버리고 도망치는 순간까지도
몇 만 원짜리 승객이나 짐짝에 불과했다
아이들에게는 저마다 사랑하는 부모가 있었지만
싸늘한 시신을 안고 오열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햇빛도 닿지 않는 저 깊은 바닥에 잠겨 있으면서도
끝까지 손을 풀지 않던 아이들,
구명복의 끈을 잡고 죽음의 공포를 견뎠던 아이들,
아이들은 수학여행 중이었다
죽음을 배우기 위해 떠난 길이 되고 말았다
지금도 교실에 갇힌 아이들이 있다
책상 밑에 의자 밑에 끼여 빠져나오지 못하는 다리와
유리창을 탕, 탕, 두드리는 손들,
그 유리창을 깰 도끼는 누구의 손에 들려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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