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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Apr 18. 2021

『끝없는 이야기』(미하엘 엔데)

이토록 정확한 제목일 수 없었다. 700쪽에 가까운 장편 소설인 『끝없는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끝없는’ 상상력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소설이었다. 1978년에 쓰인 소설인 데다 워낙 두꺼운 책이라 읽기 전에는 약간의 부담감이 있었다. 하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채로운 소재를 유려한 문장들로 풀어낸 작가의 상상력과 필력에 감탄하며, 끝까지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주인공 바스티안은 10살 난 소년으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로 넋을 놓은 듯 살고 있고, 바스티안은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한 채 외로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뚱뚱하고 못생겼으며 약골인 바스티안에게는 마음을 나눌 친구조차 없다. 그런 바스티안이 잘하는 일이 딱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이야기를 지어내는 일이었다.

어느 날 바스티안은 등굣길에 친구들의 놀림을 피해 우연히 ‘고서점’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의 주인 코레안더 씨가 읽고 있던 ‘끝없는 이야기’라는 책을 보게 된다. 바스티안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책을 훔쳐서 도망친다. 도둑질을 했다는 생각에 집으로 돌아갈 수도, 학교에 갈 수도 없다고 생각한 바스티안은 학교에  창고에 숨어 책을 펼친다.

책의 내용은 위험에 빠진 환상 세계에 대한 것이었다. 환상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는 현실 세계의 아이가 환상 세계의 ‘어린 여왕’에게 새 이름을 주어야 했고, 바스티안은 자신이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바스티안은 환상 세계로 들어가서 여러 고난을 겪으며 끝내는 환상 세계를 구해낸다. 그 과정에서 바스티안은 현실을 살아갈 큰 깨달음을 얻어서 현실로 돌아온다.      



『끝없는 이야기』는 환상 세계를 주요 소재로 한 판타지 소설이기도 하지만, 한 소년의 성장소설이기도 했다. 애당초 바스타인이 환상 세계로 들어간 목적은 환상 세계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바스티안이 구한 것은 환상 세계뿐만이 아니었다.


바스티안은 ‘자기 자신’을 구했다.


바스티안은 가장 위대한 자, 가장 강한 자, 가장 똑똑한 자이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은 지나갔다. 원래 모습으로 사랑받기를 바랐다. 착하든 못됐든, 아름답든 추하든, 똑똑하든 멍청하든 상관없이 자신의 모든 약점도 함께. 아니면 바로 그 약점 때문에 사랑받기를.(603쪽)     


바스티안이 환상 세계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아우린’이라는 ‘어린 여왕’의 표식 덕분이었다. ‘아우린’은 바스티안의 모든 소원을 가능하게 했다. 처음에 바스티안은 ‘아우린’의 힘으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강하고, 똑똑하고, 그래서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 힘으로 환상 세계를 구했음에도 바스티안은 무언가가 부족한 듯한 느낌을 받았고, 여전히 너무나 외로웠다. 끝내 자신이 원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더 나은 모습으로 변한 자신이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해줄 누군가를 강렬하게 소원했다. 그리고 그런 대상으로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바스티안을 품어준 ‘아이우올라 부인’을 만나, 현실에서 어머니에게 못다 받은 사랑을 채웠다.      


바스티안은 여전히 아이처럼 아이우올라 부인에게 응석을 부리는 것을 즐겼다. 부인의 과일도 처음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아주 맛있었지만, 점차 엄청난 식욕은 진정되었다. 바스티안은 덜 먹었다. 부인은 그걸 알아차렸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부인의 보살핌과 애정도 받을 만큼 받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욕구가 줄어드는 것과 같은 정도로 마음속에서 전혀 다른 종류의 갈망, 지금까지 바스티안이 전혀 느끼지 못했고 모든 면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소원들과 다른 욕망이 깨어났다. 바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었으면 하는 갈망이었다. (629쪽)     


어머니의 사랑이 충족된 후, 바스티안이 갈망한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것은 ‘자아 정체성’의 문제이기도 했다. 타인을 통한 인정이 아닌, 스스로를 인정하는 일. 타인의 사랑이 아닌,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 바스티안이 마지막에 가닿은 지점은 바로 그곳이었다. 바스티안은 자신이 꿈꾸던, 어쩌면 꿈꾸고 있다고 믿었던 힘, 능력, 재능을 모두 가졌지만(비록 환상세계에서였더라도),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바스티안은 갈증이 가실 때까지 마시고 또 마셨다. 기쁨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득 찼다. 살아 있다는 기쁨, 그 자신이라는 기쁨이. 이제 바스티안은 다시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에 속하는지 알게 되었던 것이다. 바스티안은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제일 멋진 점은 바스티안이 이제 원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설령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한 가지를 골라도 됐더라도 다른 걸 선택하지 않았으리라. 이제 바스티안은 알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형태의 기쁨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 기쁨들은 단 하나의 기쁨, 즉 사랑할 줄 안다는 기쁨이라는 것을. (665쪽)     


바스티안은 환상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돌아오기 직전(책 속에서 빠져나오기 직전), 자기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게 되었다. 아니, 그렇게 되었기에 현실 세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바스티안에게 환상 세계로의 여행은 여러 고난을 겪으며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는 일종의 ‘성장 여행’이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성장 여행’이 필요하다. 비단 10대의 사춘기 소년, 소녀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모든 것들이, 과연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일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인가.

우리는 끝내 무엇을 소망하며 살아야 하는가.


깊은 고민거리를 남긴 책이었다.




덧붙여. 이번에는 ‘성장’이라는 측면에 맞추어서 내용 정리를 해보았지만, 700쪽이라는 방대한 분량만큼 다양한 소재로 생각할 거리가 많은 소설이었다. ‘자아 정체성, 유년기의 부모의 사랑, 우정, 협력과 연대, 경쟁, 사랑, 자기애’ 등 여러 테마로 이야기 나눌 거리가 많았다. 10대부터 그 이후 어느 세대까지도 각자의 위치에서 공감할 만한 내용이 많았기에 부모와 자녀가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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