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한 달에 6~7권 정도의 책을 읽고 있다. 읽는 양이 많은지 적은 지는 어떤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 기준에서는 38년 평생을 통틀어 가장 많이 읽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도 책 읽기를 좋아했지만, 지금에 비하면 그때는 책을 읽었다고 할 수가 없다. 명색이 국어 교사인 데다가, 취미란에는 양심도 없이 ‘독서’라고 썼으면서 한 달에 겨우 두세 권쯤 읽었을까.(그나마도 평균을 내면 그 정도야 되겠지만, 실상은 한 달에 한 권도 제대로 읽지 못한 때가 많았다.) 더 부끄러운 것은 읽었다고 책장에 꽂아 놓은 책 중에서 내용과 감상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읽지 못할 핑계는 많았다. 할 일이 많았고, 만나야 할 사람이 많았다. 틈이 없었고, 설령 틈이 생기더라도 나중에 해야 할 일들을 위해서 쉬어야 했다. 책을 읽고 나서 정리하지 않을 이유도 충분했다. 정리한다고 한들 나중에 다시 볼 것도 아니었고, 누구에게 보일 것도 아니므로 굳이 에너지와 시간을 쏟아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에게는 취미란을 채워줄 어떤 행위(독서)와, 어떤 ‘책’을 읽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때와 비교했을 때 지금 나의 독서는 너무도 많이 달라졌다. 가장 큰 변화는 읽고 나서 기록을 남긴다는 것이다. 한 달에 읽어내는 6~7권의 책 중에서 최소한 4권쯤은 서평이든 독후감이든 짧은 감상이든, 어떤 식으로든 기록을 남기고 있다. 처음에는 한 권의 기록을 남기는 데 읽는 시간만큼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줄거리를 정리하고, 본문 중에서 울림을 준 문장을 뽑아내는 데만도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것들을 엮어서 짧든 길든 내 생각으로 써 내려가는 과정은 더 했다. 학생들에게는 대수롭지 않게 ‘독후감 쓰기’ 숙제를 내줬으면서, 정작 나는 제대로 된 독후감을 써본 적이 없었다. 아마 나도 학창 시절에 선생님이 내어주신 과제로 써본 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문득 나를 거쳐 간 학생들에게 무척이나 미안하다. 얘들아, 미안.)
한 일 년쯤, 한 오십 권쯤 그렇게 정리를 하다 보니 이제는 제법 속도가 붙었다. 처음보다 대충 써서 그런 것은 아니다. 나 스스로는 오히려 초반에 썼던 글보다 더 내실 있는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정리하는 데 걸리던 시간이 단축된 것은, 읽을 때 이미 ‘쓸 것’을 염두에 두며 읽는 습관 덕분이다.
여기서 잠깐, 내가 쓰는 방식을 정리하자면!
장편 소설을 읽을 때는 작은 챕터마다 짧은 요약을 한다. 다 읽고 나서 줄거리를 정리하려고 하면 이미 앞부분이 기억에서 잊혔으므로 요약이 어렵다. 작은 챕터마다 요약을 하게 되면 대체로 하나의 사건, 핵심 인물 위주로 요약을 할 수 있으므로 훨씬 더 시간이 절약된다. 그리고 부분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읽어가기 때문에 장편 소설도 내용 이해가 수월하다. 전체를 다 읽은 다음에 부분 부분에 요약해놓은 것들을 이어 붙이면 전체 줄거리 정리도 무척 간단히 할 수 있다.
또 읽으면서 좋았던 부분은 가감 없이 밑줄을 긋고 그 페이지 상단을 접어둔다. 예전에는 책을 깨끗이 읽고 싶은 마음에 절대로 책에 밑줄을 긋지 않았다. 메모를 하더라도 포스트잇을 사용했고, 좋은 부분은 다른 노트에 옮겨 써두었다. 문제는 그렇게 읽으니 포스트잇이 없을 때에는 메모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좋은 부분이라고 옮겨 써두고는 두 번 열어 보지 않았다. 이제는 좋은 부분은 한 페이지를 통째로 줄을 긋기도 하고, 나중에 서평이나 독후감을 쓸 때 꼭 인용하고 싶은 부분들은 접어서 표시해두기도 한다. 책을 다 읽은 뒤, 글을 쓸 때면 줄 그은 부분들과 접어놓은 페이지만 다시 읽어보면서 전체 글 내용을 구성한다.
책을 읽는 것과, 읽어도 그냥 읽지 않고 반드시 기록을 남기는 것은 내 삶에 많은 부분을 바꾸어놓았다. 읽은 책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되었고, 취미란에 ‘독서’ 두 글자를 당당히 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진짜 변화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일어났다.
책을 읽고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던 초기에는, 읽으면서 드는 생각과 감상을 쓰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그 과정을 견디고 한 편의 기록물을 탄생시키면, 그저 그 사실만으로 스스로가 대견하고 뿌듯했다. 하지만 기록이 쌓여가자, 처음에는 느끼지 못했던 전혀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
어떤 책을 읽든, 그 책이 나에게 주는 가치가 있었다. 깨달음이라고 해도 좋다. 가치든 깨달음이든, 글을 쓰다 보면 그것을 의식하며 쓸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 머리로 깨달은 바가 있으면 일상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읽고 깨닫고 기록했는데 정작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앞선 모든 과정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였다. 책이, 책 읽기가 삶을 무척이나 불편하게 만들었다.
매일은 못 쓰더라도, 일주일에 네 번쯤은 일기를 쓴다. 그중 한 번은 꼭 감사 일기를 쓰고 있다. 일상의 행복을 찾아보려는 나름의 노력이다. 아이들에게 화내지 않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참아본다. (물론 이것은 잘 안된다. 정말 안된다. 문제다.) 아이들을 키우며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물티슈를 없앴다. 외출할 때는 텀블러를 챙기고, 일회용 마스크를 버릴 때는 꼭 끈을 끊어서 버린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환경 보호다.)
책 읽기가 삶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신기하게도, 불편한 것이 불행하지는 않다. 도리어 그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는 나 자신이 기특하다. 편한 것만을 추구하고, 편하게 살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과거와 참 많이 달라졌다. 불편한 것을 견디는 과정을 통해서 전보다 조금은 나은 내가 되어가는 것 같아서 가끔은 좀 행복하다.
나를 가까이서 보는 친구들은 너 나할 것 없이 묻는다.
“애 둘 보면서 언제 그 책을 다 읽어?”
이전에는 틈날 때 읽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틈은 잘 나지 않았고, 틈이 나면 더 중요한 혹은 더 간절한 다른 일을 해야 했다. 지금은 ‘틈을 내서’ 읽는다. ‘틈날 때’와 ‘틈내서’는 아주 큰 차이가 있었다.
대개는 2주에 3권 정도의 책을 읽는데, 한 권을 다 읽고 다음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매일 3권의 책을 조금씩 나눠 읽는다. ‘틈’에 읽다 보니 한 권을 진득하게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여러 권을 짧게 쪼개어 동시에 읽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막상 그렇게 해보니, 책 읽기에 대한 부담도 줄고, 훨씬 더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한 권당 하루에 20페이지 내외만 읽는다. 2주면 300페이지가량의 책을 완독 할 수 있다.) 그리고 책의 목록에는 전자책도 한 권 이상 포함시킨다. 예상하지 못한 때에 틈을 낼 수 있으면 언제든 꺼내보기 위해서이다.
어떤 친구는 나에게 왜 그렇게 전투적으로 사냐고 묻기도 한다. 처음에는 전투적이라는 말이 좀 당황스러웠다. 내 입장에서는 전혀 전투적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눈에는 틈날 때마다 이 책 저 책 읽어가는 내 모습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에게 독서는 전력을 다하는 전투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일상 속에서 유일하게 ‘여유’를 누리는 시간이다. 에너지를 채우는 시간이고, 복잡한 머리를 비우는 시간이다. 두 아이의 엄마로 살면서 잊고 있던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자, 오직 ‘나’를 위해 주는 선물 같은 시간인 것이다.
이제야 ‘독서’를 진짜 취미라고 말할 수 있겠다.
머지않은 어떤 날에, 책에 대한 책을 한 권 쓰고 싶다는 소망을 품어본다. 알을 품듯 간절한 마음으로 품고 있다면, 언젠가는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 한 마리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
덧붙여. 하필 지난주부터 이번 주까지는 함께 읽는 책들이 모두 ‘헉’ 소리 나는 책들이라 좀 버거웠다. ‘총, 균, 쇠’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 ‘6도의 멸종’이라니! 그나마 ‘인디 워커, 이제 나를 위해 일합니다’가 있어서 버텼다. 그래도 오늘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은 다 읽었다. 장편 소설이라 2권과 3권까지 다 읽은 다음에 한꺼번에 기록을 남기려고 줄거리 요약만 해두었다. 다음번에는 제발 이런 책들은 한꺼번에 읽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