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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Jun 28. 2021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2,3』 (표도르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작품이자, 최고의 수작(秀作)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이 소설을 두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종합 소설’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표현 그대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여러 욕망, 그로 인한 심리 변화 등을 다채롭게 구현한 소설이었다.     


‘친부 살해’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소설이 전개되지만 그 안에는 치정, 출생의 비밀, 범죄, 스릴러, 법정 다툼 등의 다양한 사건들이 공존한다. 한 사람의 작가가 그처럼 다양한 사건들과 그 속에서 개인이 느낄 수 있는 복잡 미묘한 심리를 그렇게 치밀하게 묘사해낼 수 있다는 것에 감탄하며 읽었다. 권수로는 3권에 달하고, 전체 페이지는 1600페이지가 될 만큼 방대한 소설임에도 그다지 지루하지 않았다. 기독교나 러시아 문화 등에 대한 배경지식이 워낙 얕아서 읽어내기 힘든 부분들이 없지는 않았다. 이해할 수 있는 만큼 이해하고, 그렇지 못한 부분은 남겨두었지만 아쉬움은 거의 없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통해 도스토옙스키의 사상과 문학에 조금은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2권에 보면, 그루첸카(아버지 표도르와 첫째 아들 드미트리가 함께 사랑하는 여인)의 입을 통해 ‘양파 한 뿌리’라는 우화가 서술된다.      


‘옛날 옛적에 아주 못되고 못된 노파가 살았는데, 그만 죽어버렸답니다. 그런데 죽고 난 뒤에 보니 착한 일이라곤 하나도 한 게 없지 뭐예요. 악마들이 그 노파를 잡아다 불바다에 처넣었어요. 그러자 그 노파의 수호천사가 가만히 서서 곰곰 생각하는 거예요. 하느님께 말씀드릴 만한 무슨 좋은 일을 이 할멈이 한 게 없을까 하고요. 드디어 기억나서 하느님께 말씀드려요. 이 할멈은 텃밭에서 양파 한 뿌리를 뽑아 거지 여인에게 준 적이 있습니다, 하고 말이지요. 그러자 하느님께서 천사에게 이렇게 대답하시는 거예요. 그럼 네가 바로 그 양파를 가져다 불바다에 있는 그 할멈에게 내밀어 그것을 붙잡고 올라오도록 하거라. 만약 네가 그 할멈을 불바다 밖으로 끌어내면 그 할멈은 천국으로 가도 좋지만, 양파가 끊어지면 그 할멈은 지금 있는 곳에 남아야 되느니라. 천사는 그 노파에게 달려가서 양파를 내밀어주며 말해요. 할멈, 어서 붙잡고 올라와요. 그러면서 천사는 그 노파를 조심스럽게 끌어올리기 시작했는데, 마침내 거의 다 끌어올렸을 때 그 불바다에 있던 나머지 죄인들이 그 노파가 끌려 올라가는 것을 보고 자기들도 함께 올라가려고 모두 그 노파를 붙잡고 매달리기 시작했답니다. 그런데 그 노파는 아주 못되고 못돼먹어서 발로 그들을 마구 걷어차기 시작했어요. ’‘나를 끌어올려주는 거야, 너희가 아니라, 이건 내 양파지 너네들 게 아니라고.’ 노파가 이 말을 하기 무섭게 양파 줄기가 그만 툭 끊어져 버렸어요. 그래서 그 노파는 불바다 속으로 떨어져서 오늘까지도 거기서 불에 타고 있답니다. 천사는 울면서 그곳을 떠났대요.’ (2권 149쪽)     


도스토옙스키의 의도나 생각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이 우화가 결국 이 소설 전체에서 하고자 하는 말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파를 지옥에서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양파 한 뿌리’ 오직 한 번의 선행으로도 노파는 지옥에서 탈출하여 천국으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노파는 자기에게 매달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건 내 양파야’라고 말하며 그들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양파 한 뿌리’가 끊어져 버린 것은 매달린 사람들의 무게 때문이 아니라, 노파의 이기적인 마음과 표현 때문이었다.      


카라마조프가는 여자, 돈 등의 문제로 엮여 끝없이 반목하다 결국 아버지가 살해되고 범인으로 첫째 아들 드미트리가 지목되면서 파멸의 길을 간다. 둘째 아들 이반 역시 아버지의 죽음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셋째 아들 알료샤는 어떻게든 형들을 구하려하지만 쉽지 않다.


카라마조프 일가가 몰락한 것 역시, ‘양파 한 뿌리’와 관련되어 있지 않았을까. 아버지인 표도르는 단 한 번도, 단 한순간도 세 아들을 사랑으로 돌보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욕망, 욕정에만 관심을 두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아들과 맞서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첫째 아들 드미트리와 그루셴카라는 여인으로 두고 연적 관계가 된다.)


첫째 아들 드미트리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면도 있지만, 자신의 욕망 앞에서는 꼭 아버지처럼 모든 것을 놓아버릴 만큼 비이성적이다. 어린 시절, 자신을 돌봐주지 않는 아버지 대신에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인물들(하인 그리고리나 동네 의사)에 대한 감사함을 지니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누구에게도 ‘양파 한 뿌리’를 건네지 않았다. (약혼녀인 카체리나에게 선행을 베풀었던 부분이 있으나, 그가 카체리나를 배신하고 그루셴카를 사랑하면서 결국 그 선행도 퇴색해버렸다.)


둘째 아들 이반은 신을 부정하고, 인간 이성을 신뢰하는 인물이지만 모든 것은 생각이고 사상일 뿐 행동과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이 없다. ‘양파 한 뿌리’는 누군가에게 전해졌을 때 의미가 있는데, 이반은 단 한 번도 ‘전하는 행위’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그저 모든 것은 머릿속에서 사상으로만 머물 뿐이다. (가장 복잡한 심리를 지닌 인물이라, 이반의 생각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결말 부분에 가서 한 번의 실천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이반의 심리 상태가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복선으로 읽혔다.)


셋째 아들 알료샤는 형제들 중에 가장 선하며, ‘양파 한 뿌리’의 사랑을 실천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알료샤는 아버지의 살해 사건과 그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첫째 형 드미트리, 그 중간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기 또한 범인일지도 모른다며 괴로워하는 둘째 형 이반, 그들과 엮여 있는 여러 인물까지. 등장인물 모두를 차례로 만나며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보려고 노력했다. 유일하게 첫째 형의 혐의 사실을 처음부터 끝까지 믿지 않았고, 고통받는 둘째 형의 심리에 적극적으로 공감하며 형을 고통에서 구출하기 위해 애썼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카라마조프 일가의 후일담이 아니라, 한 소년의 장례식 장면이었는데 이 부분이 굉장히 의미 있었다. ‘일류샤’라는 소년의 장례식으로, 이 소년은 과거에 알료샤에게 돌팔매질을 한 적이 있던 아이였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첫째 드미트리가 술을 마시고 퇴역 대위 한 사람을 때려눕힌 적이 있었는데, 일류샤는 그 퇴역 대위의 아들이었다. 일류사와 퇴역 대위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달리 각별한 부자지간이었다. 가진 것은 없었으나, 언제나 서로에게 다정했고 많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였다. 일류샤는 그런 아버지가 드미트리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사실에 치욕을 느끼고, 카라마조프 일가에 엄청난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 길에서 우연히 알료샤를 만나 돌팔매질을 한 것이다. 후에 알료샤는 전후 사정을 알게 되고 일류샤가 죽기 직전까지 그의 곁을 지킨다. 일류샤가 보고 싶어 하는 친구들을 차례로 집에 불러오는 일부터 그들이 서로 마음을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일까지,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들을 도맡아 한다.


결국 일류샤는 죽고, 알료샤는 그의 장례식에 모인 아이들을 모아놓고 이런 말을 한다.      


이 소년은 아버지의 명예와 아버지가 당한 쓰라린 모욕을 절감했고, 그래서 분연히 일어섰던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첫째 이 소년을 평생토록 기억합시다. 비록 우리가 아무리 중요한 일에 종사하게 될지라도,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오를지라도, 아무리 커다란 불행에 빠질지라도-아무튼 우리가 전에 여기서 훌륭하고 선량한 감정으로 모두 함께 하나가 되어 이 가엾은 소년을 사랑하는 동안 얼마나 행복했고, 또 그렇게 사랑하는 동안 어쩌면 실제 우리 자신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맙시다. (중략)

좋은 어떤 추억만큼, 특히 아직 어린 시절 부모님 슬하에 살면서 갖게 된 추억만큼, 앞으로의 생활을 위해 숭고하고 강하고 유익한 것은 없다는 걸 꼭 알아두십시오. 여러분의 교육에 대해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많은 얘길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간직한 이처럼 아름답고 신성한 어떤 추억이야말로 아마도 가장 좋은 교육일 겁니다. 그런 추억을 많이 가지고 삶 속으로 들어선다면, 그 사람은 평생토록 구원받은 셈이랍니다. (중략)

여하튼 우리가 아무리 악한 사람이 될지언정, 우리가 어떻게 일류샤의 장례를 치렀는지, 그의 마지막 날들에 우리가 얼마나 그를 사랑했는지, 그리고 지금 이렇게 이 바위 옆에서 얼마나 다정하게 함께 이야기했는지를 기억한다면, 설령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될지라도 그런 우리 중에 제일 잔인하고 제일 비웃기 좋아하는 사람조차, 자신이 지금 이 순간 얼마나 선량했고 훌륭했었나 하는 것만큼은 마음속으로 감히 비웃지 못할 겁니다. 이뿐만 아니라, 아마도 바로 이 추억하나가 그를 커다란 악으로부터 지켜줄 것이며, 그는 생각을 고쳐먹고, ‘그래, 나는 그때 선량하고 용감하고 정직했지’라고 말하게 되겠지요.(3권, 521쪽)          


인간의 내부에는 선함과 악함이 반드시 공존하고, 둘 중 어떤 것이 발현될지는 그 자신이라도 알 수 없다. 알료샤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이다음에 악한 사람이 될지도, 나쁜 행동 앞에서 버텨낼 힘마저 갖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때에 우리 자신을 지켜줄 단 하나의 선행, 선하고 아름다운 추억만 있다면 ‘바로 이 추억하나가 그를 커다란 악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름의 결론을 내리자면, 결국 인간을 살아남게 하는 것은 혹은 천국으로 이끄는 것은 ‘양파 한 뿌리’가 아닐까 싶다. 도스토옙스키는 ‘너는 존재한다, 고로 사랑하라’고 했을 만큼, ‘실천적 사랑’을 무척이나 강조했다. 도스토옙스키가 말하는 실천적 사랑은 거창하고 대단한 것이 아니라, 곁에 있는 ‘단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과 행동이다. 평생 착한 일을 하지 않았지만, 단 한 번 양파 한 뿌리를 건넨 선행으로 지옥을 벗어날 기회를 얻었던 노파의 이야기만 보더라도 ‘단 한 번의 실천’이 얼마나 큰 의미가 될 수 있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나는 과연 ‘양파 한 뿌리’의 선행을 베풀며 살아왔던가.

내 아이들을 오랫동안 지켜줄, ‘단 하나의 추억’을 만들어주고 있던가.

나를 지켜준 ‘선하고 아름다운 추억’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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