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을 낳아봐야 어른이 된다는 말

by 진아

“자식을 낳아봐야 어른이 되지.”


아이를 낳기 전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다. 서른셋에 결혼을 해서, 서른넷에 첫아이를 낳았다. 그렇다면 서른넷까지의 나는 어른이 아니었을까?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 비로소 나는 어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 나는 ‘자식을 낳아야 ‘어른’이 된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자식을 낳지 않은 사람을 평가 절하하는 말에 대한 반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 지금의 내가 그 이전의 나와 달라진 것은 분명하다. 달라진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어른이 되었다기보다는, 전에 보지 못했던 세계를 보게 되었다. 내가 동의하는 형태로 표현을 바꿔보자면, ‘자식을 낳으면 조금 더 넓은 세상을 만나게 된다’ 일 것이다.


커플 원피스를 입고 나들이를 나온 엄마와 딸을 보았을 때, 이전이었다면 ‘아, 예쁘다! 내게도 딸이 생긴다면 저렇게 하고 다녀야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커플 원피스를 입고 있는 모습만 보인 것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저 엄마는 저 원피스를 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발품 또는 눈품을 팔았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새 옷을 세탁했겠지. 아이와 같은 옷을 입고 현관문을 나서기까지 얼마나 전쟁 같은 준비 시간을 지났을까. 아고, 저기 묻은 저 얼룩을 빼려면 뜨거운 물에 한참을 불려 삶아 빨아야겠다. 저 엄마는 오늘 저 잠깐의 행복을 위해서 엄청난 수고스러움을 감수해야겠네. 그래도 아이의 미소를 보니 엄청 행복한 가보다. 엄마도 그렇겠지.


엄마가 된 후로는 원피스를 준비하고, 그것을 입고 나오기까지의 모든 과정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감당해야 할 가사노동의 무게까지 눈에 보인다. 아이의 미소와 그 안에 숨겨진 충만한 사랑도 보인다. 그래서 단순히 ‘아, 예쁘다! 부럽다!’는 느낌에서 그칠 수가 없다.




엄마가 되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말끔히 정돈된 아이들에게서도, 조금은 흐트러진 아이들에게서도, 출근길을 서두르며 젖은 머리를 매만지는 엄마들에게서도, 아이들이 등원한 후 동네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엄마들에게서도, 많은 것들이 보인다.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많은 것들이 느껴진다. 고단함, 행복감, 기쁨, 슬픔, 외로움, 숨 가쁨, 괴로움, 충만함, 온전함, 불안함 등. 엄마가 되어보지 않았다면, 결코 몰랐을 세계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되면서 이제껏 내가 보고 살아온 세상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느낀다. 새로운 세계를 만나며, 종국에 깨달은 점은 세상에 귀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든 누군가의 시간을 빌려 태어난다. 누군가의 사랑으로 자라고, 누군가의 보살핌으로 키워진다. 때론 누군가의 사랑과 보살핌이 부족해서 망가진 삶을 사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그가 귀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누구나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육아 휴직 전(아이를 낳기 전) 학교에서 소위 ‘문제아’라 불리는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는 그 아이들의 ‘문제 행동’만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아마도 돌아간 학교에서 일탈 행동을 하는 아이들을 만난다면, 단순히 ‘문제아’로 보지는 않을 것 같다. 그 아이들의 행동 너머의 세계를 보게 될 것이다. 아니, 보려고 애쓸 것이다. 어째서 지금 저 아이가 저런 '행동'을 하는지, 돌아보고 다시 보며 아이들을 살필 수 있을 것 같다.

자식을 낳아봐야 '어른'이 된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확실히 전보다 품이 넓어진 것은 맞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된 것도 맞다. 자식을 낳지 않아도 넓은 품을 지닌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미 더 나은 사람이 된 경우도 있겠지. 그러나 내 경우에는 그 모든 분기점에 아이가 있었고, 엄마가 된 경험이 있었다.

아이라는 존재는 이렇게 나를 한 뼘 더 자라게 한다. 엄마가 되어서, 나는 좀 더 넓은 세계를 만나게 되었다.


비로소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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