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존재에 관한 질문들. 자주 묻고 고민했어야 하는 질문들이었다. 사춘기 소녀였던 시절에는 고민했었을까. 사춘기에 대한 진한 기억이 없는 걸 보면, 그때도 정체성의 위기 같은 건 겪지 않았던 것 같다.
고민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괜찮은 삶이었다. 대단히 깊이있게 '나'를 살펴보지 않아도 그때그때 최선의 선택을 했고, 그게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노력을 기울여 목표를 이루고 적절한 보상을 받을 때마다 확신은 짙어졌다. 그 모든 과정의 선택권을 내가 쥐고 있었기에 나란 존재를 애써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당연히 나였고, 그저 나였다.
서른이 조금 넘어 결혼을 했고, 이내 아이를 가졌다.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출산 휴가에 이어 육아휴직을 썼다.사회적 관계는 일시정지되었고 나를 찾는 이는 오직 아이, 내가 찾는 이도 오직 아이가 되었다. 그래도 별다른 갈증을 느끼지 못했다. 모든 욕구의 방향이 아이를 향해 재설정되었다. 시간과 공간은 물론이고 머리와 마음을 전부 내어 아이에게 주었다. 빈틈없이 사랑했고, 사랑받았다.
아이는 조금씩 자랐다. 그러다 어느 순간 보면 훌쩍 자라 있기도 했다. 그 순간들이 아쉬워 육아일기를 썼다. 감격스러운 아이의 성장과 변화를 행여 잊을까 봐 강박적으로 기록했다. 나의 시공간, 감정과 생각에 이어 나의 언어까지 모두 아이를 위해 쓰였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곁에 있는 남편조차 보지 못했다. 남편 역시 아빠가 처음이라 고군분투 중이었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엄마로 아빠로 사느라 서로의 존재를 보살피지 못했다. 그때 나는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엄마'라는 단 하나의 역할에서 찾고 있었다. 물론 엄마로서의 삶은 대체로 행복했고 자주 벅차올랐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가끔 어딘가가 허전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감에 몸서리치는 날도 있었다. 무언가 잃어버린 것만 같아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가족 모두가 깊이 잠든 어느 밤. 옅은 오렌지빛의 작은 수유등 아래에서 육아일기를 쓰다 말고 알 수 없는 내 마음을 글로 써보았다. 단어도 고르지 않고 앞뒤 문맥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날 것의 문장들이 쏟아졌다. 모두 잠든 고요한 밤, 차분한 불빛 아래에서 쓴 글이라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격정적이었다. 더는 쓸 것이 없겠다고 생각한 순간. 채 끝맺지도 않은 문장에 마침표를 찍는데, 옅은 해방감이 느껴졌다.
엄마였지만, 그 이전에 나였다. 엄마는 나에게 부여된 역할일 뿐 나의 전부가 아니었다. 마구잡이로 써 내려간 문장을 읽다가 깨달았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엄마로만 살아온 시간 동안 나를 잃고 외로웠다는 걸. 어쩌면 두려웠던 건지도.
어떻게든 흐려진 나를 찾고 싶었다. 나를 생각하고 싶었고, 나를 잊고 싶지 않았다. 나를 이해하고 싶었고, 나를 사랑하고 싶었다.
그 뒤로 일상의 순간에도 자주 물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했지만, 아이들 이야기가 빠질 수 없었다. 그제야 곁에 있는 남편도 보였다.친정엄마와의 관계도 돌아보았다. 이전에 하던 일, 앞으로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것, 사랑했던 이까지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끼적였다.아이들과 놀다가도문득, 식사를 준비하다가도 문득, 빨래를 개다가도 문득, 휴대전화의 메모장을 열었다.
깊은 밤이 오면 오렌지빛 불빛 아래에서 끼적여둔 단어와 문장을 글로 엮었다. 아이들의 성장과 변화를 기록하기에 바빴던 매일의 육아일기는 나의 마음과 나의 언어를 조금씩 담아내기 시작했다. 독자는 오로지 나 한 사람이었지만 아쉽지 않았다. 어차피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쓴 글이 아니었다. 묵은 생각과 감정을 쏟아내고 싶었고, 그 안에 묻혀있던 나를 꺼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때때로지난날 써두었던글을 꺼내 읽으며 내 안의 외로움을 달래고 두려움을 다독이기도 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길, 윤동주)
나의 글쓰기는 시인의 문장처럼 잃은 것을 찾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담 저쪽에 남아 있는 '나'를 만나기 위해서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길을 걷고 또 걸었다. 그 걸음이 여기까지 이어졌다.
이제 나의 글쓰기는 조금 다른 길을 찾아 흘러가는 중이다. 글로 이어진 이들이 생기고 그들과 연대하면서 담 저쪽의 내가 조금 더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나의 몸과 마음은 엄마라는 자리에 단단히 묶어두었지만, 나의 언어는 날개를 준비하는 중이다.
언젠가, ‘오직 나’라는 존재로 날아오를 순간을 꿈꾸며.
브런치 작가 3명 (선량, 읽는인간 ,진아)이 함께 쓰는 매거진입니다. 글 쓰는 사람으로 살면서 한 번쯤은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저희 세 사람의 이야기누 각각의 물길을 타고 흐르지만, 결국은 글쓰기의 바다에서 만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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