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 시간에 사랑이가 남편과 나에게 차례로 혼이 났다. 사랑이가 혼날 만한 행동을 하긴 했지만, 남편과 내가 번갈아 가며 혼을 낸 것이 저에게는 꽤 큰 상처였던 모양이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읽고 싶은 책을 골라 방에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사랑이가 내 앞에 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는 쓸모없는 사람인 것 같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인지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여러 번 되물었다.
“내가 쓸모없는 사람 같다구.”
기어이 그 말을 다시 하게 하고서야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이에게 상처를 주었구나, 안 그래도 마음이 여린 아이인데 또 실수를 했구나. 마음이 복잡했다. 일단 아이를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가 책 읽을 채비를 했다. 그리고 물었다.
“사랑아, 왜 네가 쓸모없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냥. 모르겠어.”
“네가 오늘 엄마 아빠한테 혼이 나서 속이 상했던 건 아니야?”
“…….”
“속상한 건 그럴 수 있어. 그렇지만 네가 쓸모없는 사람은 절대 아니야. 너는 엄마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아마 아빠에게도 그럴걸?”
대답하지 않는 아이를 보며 더는 자극하고 싶지 않아서, 아이가 가져온 책을 달라고 했다. 아이가 가져온 책 세 권은 모두 자연관찰 시리즈에 있는 식물 관련 책들이었다. 식물 중에서도 장미, 무궁화, 튤립, 민들레 등 꽃들의 생태에 관한 책들이었다. 아이는 엄마가 좋아하는 꽃이 나와서 골라온 책이라고 했다. 뭉클함과 미안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아이에게 책을 모두 읽어준 후, 문득 어떤 생각이 나서 다시 말을 꺼냈다.
“사랑아, 너 해님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아?”
“해님?”
“응. 해님이 없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음.. 식물이 못 자라지.”
“그렇지. 오늘 본 예쁜 꽃들도 모두 못 자랄 거야. 식물이 못 자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식물이 없으면, 초식동물들이 못 살아. 그러면 육식도 못 살겠다. 공룡처럼.”
“맞아. 진짜야. 해님이 없으면 아무도 살 수 없는 세상이 돼.”
아이는 갑자기 왜 해님 이야기를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런데 사랑아, 엄마에게는 해님보다 네가 훨씬 더 소중해. 엄마는 해님은 없어도 괜찮지만 네가 없으면 안 되거든. 너는 엄마한테 해님보다 소중한 존재야.”
“…….”
잠시 동안 아이는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한 톤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해님 없어지면 안 돼! 그럼 엄마가 좋아하는 꽃들이 못 자라잖아. 해님이 있어야 엄마 좋아하는 꽃들을 마음껏 볼 수 있지!”
아이의 마음을 위로해주기 위해 꺼낸 말이었는데, 결국은 또 내가 감동 받고야 말았다. 정말로 어쩌면 내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아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큰 게 아닐까. 아이의 우주가 나의 우주보다 더 광활한 것이 아닐까. 이러다 정말 내가 아이를 품는 게 아니라 아이가 나를 품는 날이 오는 게 아닐까.
잠들기 전 유난히 긴 대화를 나누었다. 두 아이 모두 잠들기 싫었던지 수다력이 폭발하여 온갖 이야기들이 다 나왔다. 어린이집 친구들 이야기, 선생님 이야기, 같이 읽었던 책 이야기, 함께 갔던 여행지 이야기까지. 그러다 다시 ‘꿈’ 이야기가 나와서 사랑이와 나름대로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는 봄이가 대견해서 봄이에게도 질문을 던졌다.
“봄이는 꿈이 뭐야?”
“나는 감자가 될 거야. 아니다. 고구마가 될래.”
봄이의 엉뚱한 대답에 웃음이 터져서 더 이상 진지한 분위기를 이어갈 수 없었다. 한참을 감자가 되네, 고구마가 되네, 당근이 되네, 김이 되네, 엉뚱한 꿈을 꾸고 또 꿨다. 시간이 꽤 흘러 있었다. 아이들도 조금 졸린지 목소리 톤이 조금씩 낮아졌다. 그 틈을 놓칠세라 둘을 품에 끌어안고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할아버지의 시계’를 불러 주었는데……. 거의 막바지였는데…….
“~ 이젠, 가지 않네. 가지를 않네.~”
“근데 엄마, 우리 가지 따봤잖아.”
“봄아, 이 가지는 그 가지가 아니거든!”
다시 웃음보가 터진 아이들과 나는 신나게 웃다가 누가 먼저인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아주 편안하고도 깊은 잠이.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남편은 이미 쓰러져 자고 있었다. 대단하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