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기 싫어하는 두 아이를 위해 시작한 잠자리 대화는 어느 날부터 40분을 훌쩍 넘기고 있다. 정말 안 자도 안 자도 이렇게 안 잘 수 있나 싶게, 깜깜한 방 안에서 두 아이는 한 시도 쉬지 않고 조잘거린다. 서로 먼저 말하려고, 더 많이 말하려고, 그리하여 유일한 대화 상대인 엄마를 뺏기지 않으려고, 두 아이의 오디오는 쉴 새 없이 겹친다. (남편은 이미 꿈나라행 기차를 타고 가버린 뒤다.)
“왜 엄마는 오빠랑만 이야기해?”
“왜 엄마는 봄이 얘기만 들어줘?”
“오빠 이제 그만 이야기해!”
“너나 그만 이야기해!”
잠자리에서마저 투닥거리는 아이들이라 말하는 순서까지 정해줘 가며 대화를 이어가는 일이 쉽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이 감사한 것은 보석보다 빛나는 아이의 마음을 건져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낮동안 들떠있던 마음이 가라앉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이라 그런 건지, 가무룩 잠들기 직전이라 꿈결처럼 속마음이 쏟아지는 건지, 아이들은 종일 하지 않던 속엣말을 툭 던지곤 한다. 특히 첫째 사랑이는 자리에 눕기 전까지 장난치고 까부는 모습이 영락없는 다섯 살 아이인데, 잠자리에 누워서 조근조근 말을 하는 모습은 다 큰 아이 같아서 놀랄 때가 많다.
“엄마, 오늘은 사실 조금 슬픈 날이었어.”
“응? 왜? 무슨 일이 있었어?”
“오늘 배가 아파서 슬픈 날이었어.”(저녁에 배가 조금 아프다고 해서 병원에 다녀온 터였다.)
“아, 배가 아파서 슬펐구나. 의사 선생님이 심한 건 아니래. 배탈이 조금 난 것 같다고 하셨으니까 약 먹고 음식 조심하면 괜찮을 거야.”
“그리고 엄마, 이건.. 사실 비밀인데..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은 건데..”
“...?”(이때부터 엄청 긴장을 했다. 아이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몰라서, 짐작조차 되지 않아서.)
“오늘 어린이집에서 그림 그리기를 하는데, 내가 너무 못해서. 이름도 잘 못 쓰고, 그래서 슬픈 날이었어.”
아찔했다. 전혀 짐작 못 한 일이었다. 하원을 하던 사랑이의 손에는 투명 용지에 여러 색깔의 네임펜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 들려있었다. 사랑이와 함께 하원 하던 친한 친구 두 명의 손에도 같은 것이 들려있었는데, 둘 중 한 아이의 그림이 유난히 뛰어났다. 그 아이는 사랑이와 가장 친한 친구였고, 전부터도 미술 관련 활동을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했다.
한동안은 사랑이 스스로 그 친구는 그림을 잘 그리는데, 자기는 못 그린다며 비교를 하길래 사람마다 가진 능력이 모두 다른 거라고 여러 번 말해줬었다. 언젠가부터 사랑이는 그 친구는 그림을 잘 그리고 자기는 축구를 잘한다며 각자의 능력을 인정하는 말을 하길래 안심하고 있었다.
“사랑이가 그걸 비밀로 하고 싶을 만큼 속상했구나. 그림이 마음대로 그려지지 않아서. 이름도 잘 안 써져서?”
“응. 배도 아프고...”
“그래, 배도 아프고. 하지만 배 아픈 건 약 잘 챙겨 먹으면 금세 괜찮아질 거야. 그리고 그림을 그리거나 이름을 쓰는 것도 자꾸 연습하고 도전하면 충분히 잘할 수 있어. 친구가 잘하는 것을 보고 네 마음이 슬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잘하는 친구에게는 잘한다고 말해주면 돼. 그리고 사랑이가 잘할 수 있는 일도 분명히 있잖아?”
“응, 엄마. 그 친구는 정말로 멋져.”
“그래, 참 멋진 친구다. 멋진 친구가 있는 사랑이도 멋져. 그리고 사실 엄마는 오늘 사랑이 그림에 사랑이 이름 쓰여 있는 거 바로 알아봤는데? 엄마 눈에는 네 그림이 훨씬 더 멋졌어.”
어둠 속이라 흐릿하긴 했어도, 배시시 웃는 아이의 표정이 분명하게 보였다. 아이가 오늘 또 한 뼘 자랐겠거니 생각하며 이제 그만 자자고 말하려던 그때, 예상치 못한 질문이 훅 들어왔다.
“엄마, 엄마는 오늘 마음이 어땠어?”
마음을 묻는 일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아이의 마음을 묻고 또 물었다. 마음을 들여다볼 줄 아는 어른으로 자랐으면 해서 자꾸만 물었다. 지금 너의 마음은 어떻냐고. 어떤 때는 솔직하게 말해주고 어떤 때는 답을 피해버리기도 하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내 마음을 물어왔다.
순간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이의 마음을 궁금해하느라 정작 내 마음은 자주 잊어버리는 것이 엄마들의 삶 아닌가. 아이의 질문을 받고 빠르게 하루를 정리해보았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할 수 없으니 일단 무슨 말이든 시작해야 했다.
“음, 엄마는.. 엄마는.. 오늘 마음이 대체로 평화로웠어. 사랑이랑 봄이가 어린이집에 잘 다녀왔고. 가서도 별일 없이 잘 지냈다고 했고. 생각했던 글도 썼고. 책도 좀 읽었고. 밀린 집안일도 했고. 그랬는데 저녁때 사랑이가 배가 아프다고 했을 때는 좀 걱정스러웠어. 그래도 의사 선생님이 별일 아니라고 해서 안심이 됐지. 집에 와서 함께 저녁을 먹을 때는 행복했고, 이렇게 자려고 누워서 사랑이랑 봄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 기쁘기도 해.”
“엄마 마음은 여러 개네.”
“그럼. 마음은 그때그때 달라지지. 아마 사랑이도 오늘 행복하고 기쁜 순간이 분명히 있었을 거야.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잠이 들면 좋겠다.”
사랑이는 더 이상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나와 맞잡은 손에 힘을 주는 것이 느껴졌다. 얼마 전부터 사랑이는 내 손을 잡으면 그냥 잡지 않고 꼭 깍지를 꼈다. 깍지 낀 손에 힘을 주니 손가락 사이사이까지 그 힘이 느껴졌다. 나의 말이 아이의 마음에 힘을 준 것 같아서, 내 마음에도 힘이 들어갔다.
살아갈 수많은 순간에 저보다 나은 누군가와 맞닥뜨릴 아이를 미리부터 걱정하고 싶지 않다. 누군가의 능력은 누군가의 능력대로 인정해주고, 자신의 능력은 자신의 능력대로 잘 찾아가리라 믿어주고 싶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못할 일도 아닐 것이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오늘 밤의 대화처럼, 아이가 슬픔을 느낀 어느 순간에 어김없이 생각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진한 위로가 전해지는 그런 엄마가 되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