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는 아이들, 졸다 못해 잠드는 아이들을 보면.

by 진아

수업 시작 직후 5분 간 주로 내가 하는 일은 쉬는 시간부터 잠들어 있던 아이들을 깨우는 일이다. 최대한 부드럽게 아이들을 깨우는 것이 포인트다. 등교 직후인 1교시나, 점심시간 직후인 5교시의 경우에는 이 작업(?)이 필요하지 않지만, 나머지 시간에는 대체로 꼭 필요한 작업이다.

엎드려 자고 있는 아이 곁에 가서 등을 살짝 두드리며, “00아, 샘 바뀌었다."(지난 시간부터 쭉 잤으리라 짐작되는 아이들에게는 이 멘트가 먹힌다. 저희들도 좀 민망해하며 일어난다.)라고 말한다, “00아, 어제 못 잤어? 아이고!”라며 어깨를 두드려주기도 한다. “화장실이라도 다녀올래? 물이라도 좀 마시고 오든가.”라며 일어나지 못하는 아이를 애써 일으키기도 한다.


채 2분도 되지 않는 시간이지만, 그렇게 아이들을 깨우고 수업을 시작하면 아이들이 훨씬 덜 잔다. 정말 극심한 무기력에 빠진 아이가 아니라면, 그 정도의 액션에도 몸을 일으키려 스스로 애쓴다. 이 아이들은 대체로 ‘자는 아이’보다는 ‘조는 아이’에 속하는 아이들이다. (극심한 무기력에 빠진 아이들 이야기는 언젠가 따로 다루겠다. 여기서는 보통의, 지극히 평범한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조는’ 것과 ‘자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실로 엄청난 차이이다. 졸음은 인력으로 조절이 힘들지만, 그것이 잠으로 이어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는 인력이 작용할 여지가 있다. 잘 살펴보면 보통의 아이들은 대개 ‘조는’ 아이들이다.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꾸벅거리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졸음이 이내 잠으로 이어지고야 만다는 것이지만.


아이들이 조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우선적인 것은 ‘수면 시간의 부족’이다. 진짜 잠이 부족해서 존다.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은 푹 자기 어렵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학교에 8시까지 등교해서 오후 4시 30분에 하교하면, 대부분의 아이는 학원 혹은 독서실에 간다. 물론 그 시간을 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건 안 봐도 다 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성인도 8시간 근무 내내 초집중 모드는 아니지 않는가. 심지어 근무가 끝나면 퇴근이라는 걸 하고, 월급도 받는다. 하지만 미래가 불안한 아이들에게는 완전한 퇴근도 없고, 월급과 같은 눈에 띄는 성취물도 없다.


수면시간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만약 수업이 능동적으로 배울 수 있는 구조라면 덜 졸릴 것이다. 그러나 고등학교 수업에서 ‘학생의 능동성’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다. 50분마다 다른 선생님, 다른 교과목의 강의가 줄줄이 이어지는데 안 졸고 늘 똘망똘망한 아이들이 더 신기할 지경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똘망똘망한 아이들’은 대체로 상위권 아이들이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그들은 수업 내용을 바로바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수업을 듣는 동안 자주 버퍼링에 걸리는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멍 때리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졸게’ 된다.


그렇다면 아이들의 '졸음'을 단순히 아이들의 의지 부족으로만 해석할 수 있을까. 그래도 괜찮은 걸까.




요즘 나는 조는 아이들, 졸다 못해 잠드는 아이들을 보면 안쓰럽다. 이 아이들 중 누구도 나에게 반항하겠다고 마음먹고 자는 아이는 없다. 배울 게 없거나, 배우기 싫어서 자는 아이도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스스로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많은 의무감(해야만 하는 일들)에 시달리고 있는 게 아닐까. 어느 순간 배움의 길을 놓쳐 되돌아가는 길을 잃은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이 아이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까.


“00아, 어제 못 잤어?”

“네, 샘. 어제 게임 이벤트 기간이라서 그거 한다고..”

“아이고, 수행평가는 다 했냐.”

“샘, 그거 하고 게임한다고 늦은 거예요. 그래도 저 할 건 합니다.”


한 아이와의 대화가 잊히지 않는다. 할 건 한다는 그 말이 꽤나 묵직하다. ‘게임을 하다 늦게 잤다’에 포인트를 두지 않고 ‘그럼에도 수행평가를 다 했다’에 방점을 찍고 보면, 기특하기 그지없다. 아무 생각 없는 것 같지만, 다수의 아이들이 ‘할 건 하며’ 쉽지 않은 고등학생 시절을 버티고 있다. ‘그러고 졸고 있냐’며 화내고 비난하기보다는, ‘그래서 졸리겠구나’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어른이 되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무슨 일에 '변화'가 있으려면 먼저 '이해'가 필요하다. 특히 심리학의 한 학파인 자기심리학에서는 '이해'와 '설명'이 있어야 '공감'이 가능하고, '공감'이 '변화'를 일으킨다고 했다.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 기대일 뿐이고, 그래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이해와 설명에 근접하려다 보면 무언가가 조금씩이나마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라고 믿는다. 실마리를 찾아가다 보면 운 좋게도 해법을 발견할 수도 있게 된다. ('무기력의 비밀', 김현수 지음)


아이들은 예민하다. 진심은 통한다(고 믿는다). 아마도 내일 수업 종이 울리고 교실문을 열면, 더 많은 아이들이 잠의 세계에 빠져 있을 것이다. 나흘이라는 긴 연휴 끝에 학교에 왔으니, 심지어 중간고사 끝나고 나흘을 쉬었으니!


'내일도 다정하게 아이들을 깨워야지!' 다짐한다. 어쩌면 시대착오적이고, 어쩌면 여전히 낭만적인 나는, ‘다정’의 힘을 믿으니까. ‘다정’ 속에서 그래도 많은 아이들이 몸을 일으키고 마음을 내어주리라 믿고 있으니까.


미움, 불만족, 한심함, 실망의 대상으로 자신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어른이 있다는 것만으로 아이는 크게 안심한다. 물론 아이들에게 이렇게 표현하면 대체로 면전에서는 기분 나빠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고정화된 생각에도 변화를 꾀하려 해서 아이들의 관점을 전환하는 데는 영향을 미친다. 무기력하게 지내는 자신들을 향해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감정이 미움, 불만족, 한심함, 실망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아닐지도 몰라' 하는 희망을 가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무기력의 비밀', 김현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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