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아 Jun 29. 2022

숨이 되는 글.

선량 작가님,

지금 한국은 한밤입니다. 그렇다면 밀라노는 한낮이겠군요. 작가님께 메시지를 보내면 금세 답을 하시겠지요. 이렇게 우리는 하나의 시간을 공유한 듯 이어져 있는데, 실상은 낮과 밤이라는 전혀 다른 두 시간을 살아가고 있네요. 오늘따라 왠지 우리들의 우정이 시공간을 초월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벌써 복직을 한 지도 넉 달이 되어갑니다. 겨우 넉 달인가 싶다가도, 벌써 넉 달이구나 싶기도 합니다. 워킹맘의 삶은 처음이라 자주 당황하고 종종 넘어지지만 그래도 뭐, 그럭저럭 해나가는 중입니다.      


작가님이 ‘도대체 어떻게 직장 생활도 하고 아이도 키우냐’고 물으셨으니, 제 하루 일과를 말씀드리는 것으로 편지를 시작해볼까 합니다.(무척 길 예정입니다.)

      

여섯 시 반쯤, 눈을 뜹니다. 알람 없이 하루를 시작한 지 꽤 된 것 같아요. 그쯤에는 일어나야 한다는 의식이 마법처럼 정확히 그 시간에 몸을 깨웁니다. 제 몸에 걸쳐진 아이들의 팔과 다리를 사뿐히 내려놓고 거실로 나옵니다. 전날 밤에 감고 잤던 머리카락에 물칠을 하고 세수를 합니다. (작가님이 아시다시피 배꼽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유지 중이라 아침에 머리를 감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머리에 헤어 제품을 대충 바르고 얼굴에도 로션을 발라요. 선크림 겸용인 톤업크림을 하나 바르는 것으로 화장은 마무리합니다. 이럴 땐 마스크를 쓰는 생활이 너무도 감사합니다.      


아이들이 깨기 전 간단히 아침 식사를 준비합니다. 식사를 준비한다고 해봐야 냉장고에 있는 밑반찬을 꺼내거나, 계란 프라이를 하는 것이 다입니다. 일곱 시 이십 분쯤이면 아이들을 깨워야 하는데, 웬만하면 두 아이가 스스로 일어날 수 있게 하려고 그때부터는 일부러 방문을 열어둡니다. 거실의 소리가 방까지 들리도록 조금 더 크게 부스럭거리지요. 아이들이 일어나면 그때부터 “빨리 준비해. 빨리 밥 먹자. 빨리 양치해. 빨리, 빨리…….”를 외치며 아이들 곁을 맴돕니다. 재촉해도 두 아이는 여유만만이지만, 저는 혹시라도 출근이 늦어질까 종종거리느라 몸과 마음이 바쁩니다.      


두 아이가 밥을 먹는 동안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출근 복장으로 갈아입습니다. 두 아이의 등원 가방을 다시 확인하고(전날 밤에 챙겨둡니다.), 제 출근 가방을 챙깁니다. 그 사이에도 식탁 주변을 왔다 갔다 하며 아이들의 입에 밥 한 술이라도 더 넣으려 분주하지요. 아이들이 약이라도 챙겨 먹어야 하는 날이면 더 정신이 없습니다. 밥을 먹이다가 약을 먹이다가, 아고. 전쟁이 따로 없습니다.      


양치를 시키고, 세수를 시키고, 로션을 발라줍니다. 딸아이는 머리까지 원하는 모양으로 묶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전날 챙겨둔 옷들을 입는 동안 저는 식탁 밑을 정리하고 아침 먹은 그릇을 개수대에 대충 헹궈 넣습니다.(저는 물 한 잔도 못 마시는 날들이 대부분입니다만.) 두 아이의 가방과 제 가방, 마스크 세 개를 챙겨서 현관문을 나서는 시간이 여덟 시 삼십 분입니다. 아이들이 일곱 시 이십 분에 일어났다고 가정하면, 그 한 시간 동안 제가 얼마나 자주 숨이 가쁠지 제 입에서 얼마나 자주 “빨리”라는 단어가 나왔을지 짐작이 되실까요? (그 사이에 남편은 알아서 출근을 했습니다.)     


그렇게 두 아이를 보내고 40분 동안 고속도로를 운전해 출근을 합니다. 하루에 서너 시간의 수업을 하고, 수업이 없는 시간과 점심시간에는 업무를 합니다. 수업 준비도 하고요, 수행평가가 있을 땐 채점도 합니다. 그리고 틈이 나면 필수로 이수해야 하는 교원 연수도 듣습니다. 일과가 끝나고 다시 고속도로를 운전해 집으로 옵니다.      


현관에서부터 거실까지 허물처럼 벗어놓은 아이들의 옷가지를 주워서 세탁기에 넣습니다. (남편은 왜 이게 눈에 거슬리지 않을까요.)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질끈 묶은 뒤 저녁 식사를 준비합니다. 그 사이 남편이 아이들을 씻기는 데 성공하면 그나마도 나은데 아이들은 꼭 엄마와 씻겠다고 난리입니다. 어쩔 수 없이 저녁 준비를 하다 말고 두 아이를 씻기고 저녁 준비를 마저 합니다.      


식사가 끝난 뒤, 남편이 식기세척기를 돌리는 사이 아이들과 시간을 보냅니다.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하루에 길어야 두어 시간 함께 보내는 거라 아이들의 ‘놀자’는 말을 모른 체하기가 어렵습니다. 아이들과 놀다가 마지막으로 책을 읽어주고 아홉 시 반쯤 잠자리에 듭니다. 아이들을 재우고 열 시 반이면 거실로 나옵니다. 그제야 작가님과 함께 하는 슬로우리딩 책을 읽거나 다른 독서 모임 책을 읽습니다. 요즘은 책 퇴고 작업을 하느라 책을 읽을 시간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아이들을 재운 후에는 한두 시간이라도 글을 읽고 쓰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잠자기 전, 다음 날 아이들이 입을 옷을 챙기고 아이들의 가방을 챙겨둡니다.     


이렇게나 길게 썼지만, 미처 쓰지 못한 일들도 많습니다. 아이들이 아프기라도 한 날이면 병원도 데려가야 하고 죽도 끓여야 합니다. 매일 하는 빨래는 개지 못한 채 빨래통에 쌓여 있는 날이 허다합니다. 청소기는 돌려도 물걸레질을 자주 하지 못하니 집안 곳곳에 아이들이 흘려놓은 밥풀과 먼지들이 굴러다닙니다. 사다 놓은 반찬을 그때그때 해결하지 못해 냉장고에는 음식물쓰레기가 쌓이고, 텔레비전 위와 책꽂이 사이사이의 먼지는 아우. 말해 뭐 할까요. 학교일은 집에 안 들고 오려고 노력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언제나 하루살이처럼 수업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작가님, 직장 생활을 하면서 돈을 벌고 있는 저에게 글이 어떤 의미냐고 물으셨지요. 어떤 답을 드려야 할까 아주 깊이 고민했습니다. 질문을 받은 날로부터 오늘까지 내내 그 생각을 했다고 하면 믿으실까요. 긴 고민 끝에 내린 답은, 저에게 글은 돈이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장난 같은 소리인가 싶으시지요? 그런데 그 이상의 답을 드릴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제게 글은 돈과 상관없는, 그러니까 아무런 실질적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 것이라서 더 큰 의미가 됩니다.      


한 치의 여유도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 글쓰기는 숨이 됩니다. 전쟁 같은 아침 시간을 무사히 넘기고 두 아이를 등원시킨 뒤, 40분간의 출근길에서 글쓰기를 생각합니다. 일을 하다가 짬이 나면, 아주 잠깐의 시간 동안에도 글쓰기를 생각하구요. 퇴근길에도, 두 아이가 저희들끼리 잘 놀아 잠깐의 여유가 생겼을 때도, 아이들의 재우면서도, 글쓰기를 생각해요. 그게 저에게는 숨이 됩니다.


만약에 작가님이셨다면 드라마를 보거나 잠을 더 주무셨을 것 같다고 하셨지요? 저도 가끔은 그러고 싶기도 하고 실제로 그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완전히 그쪽 길로 돌아서지는 못할 것 같아요. 처음부터 글쓰기를 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제는 너무 멀리 와버린 느낌이 듭니다.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엄마나 직장인, 아내와 같은 역할을 벗어던지고, 딱 '나'로만 존재하는 것 같거든요. 뭐랄까요. 와이어가 박힌 브래지어를 탁! 풀어버린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해방감 같은 거요.


해방, 요즘 한국에서 대단히 유행하는 단어입니다. 이제 종영했습니다만,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 덕분에요. (해방 외에 추앙이라는 단어도 유행시켰습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한 번 보시기를.) 드라마 속 인물들은 모두 '해방'되지 못한 삶에서 '해방'을 꿈꾸는 인물들입니다. 그들 중 몇이 '해방일지'라는 것을 쓰는 내용이 있는데, 그 장면에서 유레카를 외쳤지 뭐예요.


'그래! 나도 그래서 쓰는 거지. 수많은 역할들이 부여한 책임과 의무에서 잠시라도 해방되고 싶어서. 그렇게 다시 또 살아갈 힘을 얻고 싶어서. 조금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기 위해서.'


그러니 제 글쓰기는 애당초 돈이 될 수 없었던 거겠죠. 돈이 되어야 할 이유도 없었구요. 지향점이 다른 곳에 있었으니까요.




작가님, 이쯤 쓰고 보니 저도 질문이 생깁니다. 작가님은 글을 써서 돈을 버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셨지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작가님께 ‘글이 곧 돈’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건 작가님 글에서 보이거든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그 많은 일들을 무료로 하지 않으셨겠지요.^^;;) 작가님께 글은 진짜 어떤 의미일까요. 어떤 의미이길래, 돈이 되지 않던 그 무수한 시간들에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쓰고 또 쓰셨던 걸까요.   

   

아, 오늘의 편지는 호흡이 좀 길었습니다. 요즘 제가 답답한 일들이 좀 많습니다. 글쓰기로 숨을 쉬는 사람이다 보니, 글의 길이만으로도 요즘 제 상태가 탄로 난 것 같네요.^^;; 아무쪼록 제 숨길이 작가님이 계시는 곳까지 무사히 닿기를 바랍니다. 작가님의 답장이 오기까지, 저는 또 제 숨을 잘 쉬어가며 일상을 단단히 버티어 보겠습니다. 그럼 이만.

      

대구에서 진아 드림.



선량, 읽는인간, 진아.


밀라노, 도쿄, 대구.

서로 다른 곳에 사는 세 사람이 글쓰기로 만났습니다. 사는 이야기부터 글쓰기 이야기까지 주제를 넘나들며 편지를 주고 받습니다. 지극히 사적인 편지라는 형식을 취하지만, 저희가 주고 받는 이야기를 통해 위로와 공감이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직장에 다니며 글을 쓰는 작가님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