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열일곱, 지금의 열일곱.

by 진아

방학이다. 요즘 고등학교의 여름방학은 3주다. 그중에서 이번 일주일은 (자율 선택형) 보충수업이 있었으니, 다음 열흘이 진짜 방학인 셈이다. 올해는 담임을 맡지 않아, 특별히 신경 쓸 일은 없다. 그래도 한 학기 동안 아이들과 꽤 정이 들었는지, 잘 지내고 있는지 종종 궁금한 마음이 든다.


한 학기가 끝나던 날, 아이들은 1학기 성적표를 받았다. 성적표에는 과목마다 1(등급)부터 9(등급)까지의 숫자가 표기되어 있었을 것이다. (예체능 과목 제외) 상위 등급(1~2등급)을 받은 아이들은 다음 학기에도 그 성적을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고, 중위 등급(3~5등급)을 받은 아이들은 다음 학기에 성적을 올려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위 등급을 받은 아이들은 아예 성적을 포기한 아이들이니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결코 아니다에 한 표를 던진다. 하위 등급을 받은 아이들은 그 아이들대로 성적과 진학에 관한 스트레스를 짊어진 채로 방학을 맞이했을 것이다.




나의 열일곱, 고1 여름방학을 떠올리면 정말 실컷 논 기억뿐이다.


'성적은 이미 나왔고, 돌이킬 수 없는 과거형이 되었다. 2학기 걱정은 2학기에 해도 늦지 않다. 수능은 아직 멀었다. 그러니 놀자!'


이게 딱 당시 나와 친구들의 사고였다.(그 당시에도 미래를 먼저 준비하는 아이들이 있었으나, 그런 아이들은 내 친구가 아니었다.) 고향이 부산이라 여름방학이면 으레 친구들과 해수욕장을 찾았다. 해운대와 송정 해수욕장이 주로 가던 곳이었는데, 팔다리가 새까맣게 타도록 노란 대형 튜브를 타고 놀고 또 놀았다. 가족여행도 매 방학마다 갔다. 종합학원을 한 군데 다니긴 했어도 방학 땐 일정이 그렇게 빡빡하지 않았다. 학원 숙제를 하고, 학원 수업에 두어 시간쯤 다녀오는 것이 방학 일과의 전부였다.


지금의 열일곱, 고1 아이들은 어떻게 방학을 보내고 있을까? 사실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보충수업도 자율적으로 실시되었기 때문에 방학이 3주로 짧아졌다 해도, 아이들에게 여가 시간은 꽤 많았을 것이다. 물론 과거의 나처럼 해수욕을 즐기는 아이들은 거의 없고 PC 게임이나 유튜브 시청 등에 몰두하고 있는 아이들이 많겠지만.

과거 나의 열일곱과 지금의 열일곱의 가장 큰 차이점은 마음가짐이다. 지금의 열일곱이 짊어진 삶의 무게는 꽤 무겁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수능 벼락치기로 지방 국립대에 입학했다. 수능을 벼락치기했다고 하면 “그게 가능해?”라는 질문이 따른다. 평소 중간 기말고사도 늘 시험 이삼일 전이 되어서야 벼락치기로 준비하던 나였다. (그때의 나는 그랬다. 할 일을 꼬박꼬박 미루지 않게 된 것은 대학 졸업반이 되어서였다.) 수능은 평소 중간 기말고사와 다르게 정확히 4개월을 준비했다. 수능 준비에 4개월이면 벼락치기라 할 만하지 않을까?


11월에 치러지는 시험을 7월부터 준비했다. 당시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틀어지면서 친구들 무리에서 한순간에 배제되었는데,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랬는지 몰라도 ‘좋은 성적을 받아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걸로 나란 존재를 보여줘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때부터 오기로 공부했다. 엉덩이 뗄 틈 없이, 시중에 나와있는 과목별 문제집이란 문제집은 다 풀었다. 사회탐구와 과학탐구 영역의 경우에는 비슷한 유형의 문제들을 하도 많이 풀어서, 문제를 채 다 읽지 않아도 답을 짐작할 수 있는 지경에 다달았다.


어쨌든, 고3 첫 모의고사 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성적을 수능에서 받았다. 그때 담임 선생님께서는 나의 가채점 결과를 들으시고 채점이 잘못되었으니 다시 해보라고 말씀하실 정도였다.(이런 웃픈 상황이라니!) 아무튼 모의고사보다 수능을 더 잘 친 애들은 거의 없었다. 고3초까지만 해도 꿈도 못 꾸던 국립대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나는 내가 평생 몸담고 살아갈 국어교사로서의 길을 찾았고, 지금껏 행복한 교직 생활을 하고 있다.


지금 고등학생에게는 불가능한 시나리오다. 판타지에 가깝다. 지금 고등학생들은 고1 때의 성적이 내신성적에서 무척이나 중요하다. 전에는 고2, 고3으로 갈수록 반영비율이 높았는데, 요즘은 고1 성적과 학생부 기록이 고3 성적 못지않게 중요하다. 열일곱에 자신의 진로를 설계하고, 관련 과목을 찾아 듣고(고교학점제), 학생부 기록을 만들면서(진로와 관련되었거나 자신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는 기록), 좋은 성적도 받아야 한다. 이 틀이 깨지면, 역전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정시로 대학을 가면 되지 않냐고들 하지만, 그건 잘 모르는 말이다. 학생부 준비와 수능 준비를 동시에 하는 것이 보통의 평범한 아이들에게 쉽지 않고, 학생부를 준비하다 미끄러졌을 때 (나처럼) 벼락치기로라도 수능을 준비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다시 방학 이야기로 돌아가 본다. 아이들은 방학을 잘 보내고 있을까? 편안한 마음으로, 조금은 느긋하게 보내고 있을까? 아무 생각 없이 놀고만 있어 부모님들의 속이 터지는 집도 많으리라 예상한다. (어쩌면 이런 아이들이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주 보충수업에서 만났던 아이들의 불안한 눈빛을 떠올리니 방학마저 제대로 쉬고 있지 못할까 봐 안쓰러운 마음이 먼저 든다.

열일곱,

무언가를 결정하기엔 너무 이른 나이다. 무언가를 선택하기엔 너무 빠른 나이고, 실패에 낙담하기엔 너무 적은 나이다.


열일곱은 선택과 결정을 유보하고, 많은 실패를 경험하기에 꽤 적당한 나이가 아닐까, 생각이 깊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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