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은 아이일까? 이 매거진에 글을 쓰면서 별다른 고민 없이 내가 만나는 아이들을 '아이'라 칭했다. '공부를 하기 위해 학교에 다니는 사람'이라는 뜻의 학생보다는 어쩐지 아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지칭하면 학생이 맞고, 법적인 단어를 빌려 쓰자면 ‘청소년’이라는 단어도 있지만 내게는 그저 ‘아이’로 느껴진다.
아이를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나이가 어린 사람’이라고 나온다. 나는 이들이 사회적 통념상 아직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아이’라고 부르는 것인가. 그건 확실히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성인에 비해 조금 더 넓고 깊은 보호망이 필요한 존재이기에 ‘아이’로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 여전히 ‘아이’ 다운 낙관을 지니고 있기에 그렇다.
내가 느낀 ‘아이’ 다운 낙관은 이런 것이다. 이전 수업에서 ‘수오재기(정약용)’를 다루고, 자신에 대한 질문 50개에 답을 해보는 활동을 한 적이 있다. (관련 글 : ) 그때 질문에 ‘나의 20대는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가 있었다. 같은 맥락으로 30대, 40대에 관한 질문도 있었다. 늘 현재를 불안해하는 아이들이었는데, 놀랍게도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신의 20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가는 것(주로 대학 진학에 성공, 이성 친구와 교제 중, 자유를 만끽하며 어른의 삶의 즐기는 것 등)으로, 30대는 직업을 갖고 열심히 경제활동을 하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는 것으로(간혹 싱글라이프를 즐기는 것으로도), 40대는 보다 안정적인 삶을 꾸려가는 것으로 상상하고 있었다. 당장의 성적 때문에 괴로워하고 입시를 생각하면 고통스러워하던 아이들이, 어쩐 일인지 먼 미래는 꽤 낭만적으로 그리고 있었다.
곧 40대를 앞둔 내게는, 지극히 아이다운 낙관으로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나도 10대 때는 그랬다. 꿈이 있건 없건, 당장 눈앞의 성적이 좋건 나쁘건, 어른이 되면 학교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거라고, 조금 더 내가 원하는 삶에 가까워질 것이라고 마냥 낭만적으로 생각했다. 막상 마주한 20대와 30대에는 낭만이 들어설 자리라고는 한 뼘도 되지 않았다. 대학 입시는 나지막한 동네 뒷동산쯤이었고, 취업과 연애, 사회생활과 결혼, 출산과 육아는 히말라야 산맥의 어느 봉우리와 같았다.
현실과 부딪히며 꿈을 접어야 하고, 생활과 타협하며 적당히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어렴풋하게나마 ‘어른이 되었다’ 느꼈다. 현재가 불안하든 어쩌든 미래를 낙관할 수 있던 때가 나에겐 ‘아이’였던 때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학생들을 자꾸 ‘아이’라 칭하게 된다.
아이들이 그리는 미래는, 사실 비현실적인 꿈이다. 아이들이 지금 써내려 간 자신의 20대와 30대, 40대는 낭만이고 소설이다. 아이들은 아직 모른다. (이야기를 해줘도 결코 모를 것이다.) 저희들이 20대가 되고, 30대가 되었을 때 나처럼 부딪히고 깨지면서 차차 깨닫게 될 것이다. 자신들이 그렸던 무한한 낙관이, 한여름밤의 꿈같은 것이었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만난 아이들이 그리는 낙관이 아이들이 경험할 미래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더 오래 낙관할 수 있기를, 계속 낙관할 수 있기를.
조금만 비관하고 이내 다시 낙관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