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아는 작가로서의 제 이름입니다. 어쩐지 ‘필명’이라는 단어는 너무 거창한 것 같지만, 맥락으로 따지면 진아는 저의 필명임이 틀림없지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글을 쓰는 삶을 살고 싶다 꿈꾼 적 없던 삶이었습니다. 입시부터 졸업, 취업, 연애, 결혼, 출산, 육아로 이어지는 생의 미션들을 해내기에도 버거운 삶이었어요.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었고, 앞을 내다볼 여유도 없었습니다. 지금을 정리할 틈조차 쉽게 낼 수 없는 날들이었어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서야 비로소 잠시 멈출 수 있었습니다. 멈춘 자리에서 글쓰기가 시작되었고, 어제와 그제, 오늘과 지금, 내일과 모레를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본격적인 글쓰기는 바로 이 플랫폼인 ‘브런치’에서 시작했습니다. 유명무실한 블로그가 있긴 하지만, 말 그대로 이름뿐인 곳이고 인스타는 브런치를 하던 와중에 책 계정으로만 운영하려고 새롭게 개설한 SNS였어요. 저의 글쓰기는 브런치에서 시작하여 오직 브런치에서만 계속되고 있는 셈입니다.
브런치를 처음 개설할 때, 작가명을 정해야 했어요. 그때 저는 정말 잠깐의 고민도 없이 ‘진아’라고 썼습니다. 이후로 인스타도, 첫 책의 저자명도, 두 번째 책의 저자명도 모두 ‘진아’가 되었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여러 역할이 덧씌워진 제 이름 석 자를 내려놓고 오롯이 ‘진아’가 됩니다. 엄마로서 겪은 일도, 교사로서 느낀 마음도, 딸로서, 아내로서, 친구로서, 언니로서 경험한 모든 것들도, ‘진아’로 쓰는 동안에는 글감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일들이 됩니다. 그렇게 한 걸음 뒤에서 역할 고민을 되짚어 봐요. 글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면, 언제나 한결 가벼워집니다. 다시 제 이름 석 자로 돌아올 힘을 얻어요.
저에게 ‘진아’라는 이름은 사실 필명이라기보다 ‘본명’에 가깝습니다. 아니, 본명보다 더 본명 같아요. ‘진아’는 제 이름 끝 자에 ‘-아’라는 호격 조사(부르는 말 뒤에 붙이는 조사)를 붙인 말입니다. ‘진아’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저희 외가 식구들과 엄마가 저를 부르던 이름이었어요.
“진아야-”
저를 부르는 말을 쓰면서 저는 수 개의 음성을 함께 듣습니다. 4년 전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중후한 음성, 여전히 엄마와 함께 계시는 외할머니의 따스한 음성, 언제나 저를 향한 믿음이 가득한 엄마의 음성, 제가 집안의 자랑이라 서슴없이 말해주는 부드러운 이모의 음성, 다정한 마음이 담뿍 담긴 삼촌들의 음성까지. 저를 ‘진아’라고 불러주신 분들은 모두 저를 키우고 살리신 분들입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제 이름 석 자가 아니지만 저를 드러낼 수 있는 이름을 찾자니 ‘진아’만 한 것이 없었습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고, 한 순간의 추억도 남아 있지 않은 아빠의 성이 들어간 제 이름 석 자보다, 더 본질적인 뿌리를 품고 있는 이름이 ‘진아’였으니까요. 어쩐지 ‘진아’라는 이름으로 쓰는 글에는, 조금의 거짓도 담지 않을 거라는 믿음과 확신이 있었습니다. 사회적 자아로서의 무게를 내려놓고 좀 더 내밀한 자아를 탐구해 나가는 과정을 쓸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있었어요.
내일이면 두 번째 책이 정식 출간됩니다. ‘쓰다보면 보이는 것들’, 쓰면서 만나게 된 여러 마음들을 썼습니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써서 덜 외로웠고 더 행복했습니다. 두 번째 책에도 제 이름은 ‘진아’입니다. ‘진아’ 일 때 훨씬 더 저다운 이야기를 쓸 수 있으니까요.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의 실물 사진을 보고 있는데, 첫째 아이가 와서 묻습니다.
“엄마, 엄마 책 언제 온대?”
“응. 내일쯤 나오니까 우리 집에 오려면 화요일이나 수요일쯤?”
“이번에도 엄마 책에는 진아야?”
“응. 맞아. 책에서 엄마 이름은 진아야.”
“근데 왜 진아라고 했다고 했지?”(이미 몇 번 말해주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부산 할머니(아이에게는 외할머니입니다.)랑 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가 엄마를 ‘진아야’하고 불렀거든. 엄마는 그게 참 좋아서.”
“부산 할머니랑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슬프겠네.”
“그렇겠지? 엄청 슬플 것 같아. 더 이상 엄마를 ‘진아야’ 하고 불러주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엄마가 할머니를 그리워하겠네. 진아도 그립고.”
어쩌면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생각했습니다. 정말 그리울 거라고 말하는데 주책맞게 눈물이 나려고 했어요. 집 정리를 한다는 핑계로 몸을 일으켜 청소기를 돌리려는데, 아이가 다시 와서 말합니다.
“엄마, 그럼 이제 우리가 엄마를 진아로 불러주면 어때? 진아 엄마~ 하고.”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요. 아이를 안아주고 너무 고맙다고 말해주었어요. 네가 있어서 엄마는 영원히 ‘진아’일 수 있겠다고요.
아이 덕분에 ‘진아’로서의 생명을 무한히 연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진아’로서 더 많은 글을 쓰며 살라는 하늘의 뜻인가 싶기도 합니다. 따뜻하고 다정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마음으로 오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진아 엄마’라고 불러주겠다는 아이가, 훗날 글자를 익혀 제 책을 읽게 되었을 때 ‘진아’라는 이름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도록이요.
날씨가 11월답지 않게 따듯합니다. ‘-답지 않은’이 11월의 날씨 뒤에 붙으니 어쩐지 따사로운 햇살을 마냥 즐기기에 죄책감 같은 것이 듭니다만. 그럼에도 가을을 길게 품을 수 있는 것은 감사하고 행복한 일입니다. 11월의 마지막 주, 조금 더 많이 웃고, 조금 덜 힘든 날들이시기를 바라겠습니다.
- 진아 드림 -
쓰다보면 보이는 것들(진아, 정아, 선량)
도쿄에 사시는 읽는인간 작가님과 밀라노에 사시는 선량 작가님,
두 분과 함께 쓴 책입니다. 글쓰기를 소재로 쓴 책이지만, 결국에는 ‘나’를 발견하고 ‘당신’과 함께 하기를 꿈꾸며 ‘길’을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특히나 브런치에서 활동하시는 분들께는 의미 있는 책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내일부터 정식 출간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