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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맛을 바꾸는 시 한 스푼
나는 오늘 무엇이었나
나는 오늘(오은)
by
진아
Jun 19.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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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는 여름]
여섯 번째 시
나는 오늘(오은)
나는 오늘 토마토
앞으로 걸어도 나
뒤로 걸어도 나
꽉 차 있었다
나는 오늘 나무
햇빛이 내 위로 쏟아졌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위로 옆으로
사방으로 자라고 있었다
나는 오늘 유리
금이 간 채로 울었다
거짓말처럼 눈물이 고였다
진짜 같은 얼룩이 생겼다
나는 오늘 구름
시시각각 표정을 바꿀 수 있었다
내 기분에 취해 떠다닐 수 있었다
나는 오늘 종이
무엇을 써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텅 빈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사각사각 나를 쓰다듬어 줄 사람이 절실했다
나는 오늘 일요일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오늘 그림자
내가 나를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잘못한 일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나는 오늘 공기
네 옆을 맴돌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너를 살아 있게 해주고 싶었다
나는 오늘 토마토
네 앞에서 온몸이 그만 붉게 물들고 말았다
출처: <마음의 일>(오은 시집, 재수 그림)
주말 잘 보내셨나요. 저는 둘째 아이가 독감에 걸려서, 주말 내내 아픈 아이를 돌보며 지냈습니다. 다행히 아이의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어요. 덕분에 아이와 둘이서 알콩달콩 시간을 보냈습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갔네요.
아이가 일찍 잠든 일요일 밤, 이번주에 곱게 써서 배달할 시들을 골랐습니다. 집에 있는 시집도 뒤적여보고, 평소 눈여겨보던 시인의 시를 소개한 인터넷 사이트도 살펴봤어요. 예전에 필사했던 시필사노트도 찾아보고, 시를 소재로 한 에세이들도 훑어봤습니다.
그러다 오은 시인의 '나는 오늘'을 만났습니다. 딱 한 연만으로도 이 시를 월요일에 배달해야겠다 마음먹었어요. 어떤 연일지 짐작이 되시나요? 아마 대부분의 독자님들은 곧바로 눈치를 채셨을 것 같아요.
'나는 오늘 일요일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누구에게나 월요일은 그런 날이구나, 피식 웃으며 이 시를 필사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른 아침 인스타스토리를 통해 이 시를 배달했는데요, 필사를 함께 하는 분들 중 몇 분이 약속이나 한 듯이 시의 마지막에 자신의 오늘 이야기를 덧붙여주셨어요.
참 다양한 오늘의 '나'가 있었습니다. '나는 오늘 온전한 나, 나는 오늘 고무줄, 나는 오늘 한 편의 시, 나는 오늘 밴드..' 뿐만 아닙니다. '나의 오늘은 무엇이었을까, '라는 똑같은 질문을 던지신 분들도 몇 분 계셨어요.
한 편의 시를 놓고 같은 고민을 하기도 하고, 같은 생각을 다르게 표현하기도 하는 분들을 보며 잔잔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월요일이 오는 게 싫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 고른 시였는데, 시를 받으신 분들의 마음에는 작은 조약돌 하나를 던진 것 같네요.
생각해 봅니다. 나는 오늘 무엇이었나. 오늘 유난히도 아이들에게 날카로웠던 모습이 곧장 떠오릅니다.
'나는 오늘 바늘,
네 마음 날카롭게 상처 내고
벌어진 그 마음을 겨우 시침질했다.
얼기설기 지나간 바늘땀 사이로 비친 상처
모른 척, 다시 날을 다듬었다.'
쓰고 보니, 내일은 좀 더 다정한 나를 써야겠다는 다짐이 선명해지는 밤입니다. 여러분의 오늘은 어떠셨나요. 부디 따뜻하고, 다정하고, 기꺼운 오늘이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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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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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교실은 살아 있다
저자
학교와 수업 이야기, 책 리뷰와 일상에세이를 주로 씁니다. 궁극적으로는 작가의 삶을 살고 싶은, 두 아이의 엄마이자 고등학교 국어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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