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김성규)
[시 쓰는 여름] 서른 번째 시
유랑(김성규)
나, 걸었지
모래 우에 발자국 남기며
길은 멀고도 먼 바다
목말라 퍼먹을 게 없어 기억을 퍼먹으며
뒤를 돌아보았지
누군가의 목소리가 날 부를까
이미 지워진 발자국
되돌아갈 수 없었지
길 끝에는 새로운 길이 있다고
부스러기처럼 씨앗처럼 모래 흩날리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길
이제 혼자 걷고 있었지
깨어보니
무언가 집에 놓고 왔을까
이미 지워진 발자국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걸으며
목말라 퍼먹을 게 없어 기억을 퍼먹으며
길 끝에 또다른 길이 있을까
출처:<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 창비 2013
여러 가지로 마음이 무거운 날들입니다. 교사가 된 지 올해로 12년입니다. 육아휴직 기간이 길어 실 근무 경력은 10년이 채 되지 않지만, 학교를 떠나 있던 순간에도 교사라는 정체성을 잊은 적은 없습니다. 그동안 정말 많은 학생들을 만났고, 많은 학부모님도 만났습니다. 힘들게 하는 아이들, 불신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학부모님이 왜 없었겠냐마는 따뜻한 마음으로 한결같이 믿어준 아이들, 같은 마음으로 지켜봐 주신 학부모님들이 대부분이셨습니다. 이런 걸 다행이라 말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를 그대로 저격하며 쌍욕을 하는 아이는 없었고 물리적 힘을 가한 아이도 없었습니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문자와 전화를 주신 학부모님은 계셨어도, 대놓고 인신공격을 하시거나 위협적인 발언을 하신 분도 없었어요. 이걸 운이 좋았다고 표현해도 되는 걸까요.
교사들이 지금 이렇게 단체 행동까지 불사할 각오로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지금의 문제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겪지 않았던 것은 이제껏 ‘운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언제든 제 일이 될 수 있는 일입니다. 당장 오늘도, 내일도 그럴 수 있습니다. 지금 만나는 아이들과는 잘 지내고 있지만, 다음 연도에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게 되면, 4년에 한 번씩 새로운 학교로 일터를 옮기게 되면 언제든지 제가 감당해야 할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두려움은 교직에 있는 이상 결코 떨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유랑(김성규)’을 읽으며, 교실에서 생을 달리하신 선생님을 떠올렸습니다. 이미 돌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셨던 건 아닐까, 이 길 끝에 정말 또 다른 길이 있을까 의심하셨던 건 아닐까. 그러다 정말 혼자라고 느끼셨던 건 아닐까.. 선배교사로서 마음이 미어집니다. 늘 일이 벌어진 후에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사과하는 이런 일의 반복이 아프다 못해 괴롭습니다.
제가 아주 아끼고 사랑하는 제자가 작년에 교직에 발령을 받았습니다. 먼저 떠나신 선생님과 꼭 같은 나이, 같은 연차입니다. 다른 지역의 중학교에 발령을 받아 혼자 고군분투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며 늘 마음이 조마조마하던 차에, 이번 소식을 접하고 나니 그 제자가 매일 마음에 밟힙니다. 얼마나 열심히 해서 그 자리에 갔는지 너무 잘 아는데, 신규 발령 일 년 만에 퇴직금과 연금 수령 연차에 대해 알아보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너무 가볍게 대꾸하지는 않았던가 돌아봅니다. 학생들 문제로 힘들어할 때, 수업 문제로 고민할 때 제가 건넨 조언이 혹여 너무 교과서 같은 말은 아니었나 곱씹게 됩니다.
이제 교직을 지키는 일은 비단 저 하나를 지키는 문제가 아닙니다. 교권회복이라는 거창한 말을 붙이지 않아도 좋습니다. 저와 함께 근무하는 동료 선생님들의 생존을 위한 일이고, 딸처럼 아끼는 제자의 생명과 관련된 일입니다. 지금도 교직을 꿈꾸며 열심히 공부하고 생기부를 관리하는 제 학생들의 꿈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고요. 나아가면 결국에는 그렇게 지켜낸 학교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낼, 아이들을 지킬 힘을 얻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며칠째 마음이 허우적거렸는데, 이 글을 쓰면서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 곧 2학기가 시작될 겁니다. 조금 더 단단해진 마음으로 출근을 해야겠습니다. 그곳에는 제가 지켜야 할 많은 것들이 존재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