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편의 힘(이정록)
[시 쓰는 여름] 서른네 번째 시
뒤편의 힘(이정록)
쓸모도 없는 발가락,
며느리발톱 하나가
닭발 뒤편에 달려 있다
수렁이나 철망에 빠져보면 안다
허공만을 딛고 있던 작고 못난 발가락이
마지막 버팀목이 된다
지켜준다는 건 조용하게
뒤편에 있어준다는 것이다
똥 싸는 일을
뒤를 본다고 쓰는
얼간이도 있다마는
뒤를 본다는 것은
알을 낳는다는 말이다
희망을 돌아본다는 약속이다
해가 뜰 때까지
매일 까치발을 딛고 있다가,
닭은 발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소중한 건 뒤편에 있다
뒤편이 되어주는 것이다
출처:<그럴 때가 있다>, 창비시선 476, 2022
사진첩을 보다가 새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아이들의 뒷모습을 찍어둔 사진이 정말 많더라고요. 엄마가 되기 이전의 기억을 되짚어 보니, 누군가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본 기억이 없습니다. 친구의 사진도, 연인의 사진도, 가족의 사진도, 모두 누군가의 앞모습을 예쁘게 담은 것들이었어요. (측면은 있습니다만) 뒷모습을, 한두 장도 아니고 이토록 자주, 많이 찍게 된 건 분명히 엄마가 된 이후의 일입니다.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아련한 마음이 듭니다. 언제 저만큼 자라, 저를 앞서 가는 두 아이를 볼 때마다 대견함도, 후련함도, 허전함도, 기쁨도, 슬픔도 아닌 아주 모호한 감정이 밀려듭니다. 감정을
붙잡을 수 없어서 사진을 찍습니다. 누군가의 뒷모습을 담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전부를 사랑하는 것의 다른 말인가 봅니다.
'뒤편의 힘(이정록)'은 아무 쓸모없어 보이는 닭발 뒤편의 며느리발톱에 주목합니다. '수렁이나 철망'에 빠지는 극한 상황이 되어 존재의 가치를 드러내는 며느리발톱. 그것은 닭발 '뒤편'에 있습니다. '지켜준다는 건 조용하게/뒤편에 있어준다는 것이다'라는 표현으로 며느리발톱의 가치는 더없이 소중한 것이 되어요.
누군가는 '똥 싸는 일을/뒤를 본다고 쓰'지만, 화자는 다르게 봅니다. '뒤를 본다는 것은/알을 낳는다는 말이다'라고요. '똥을 싸는 일'이 몸에서 필요 없는 것을 배출하는 일이라면, '알을 낳는다'는 말은 소중한 것을 탄생시키는 일입니다. 존재의 내부에서 발생한 무언가를 바깥으로 내보내는 행위라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지만, 똥과 알의 존재 가치는 천지 차이지요. 화자는 뒤를 보는 일이 '알을 낳는, 즉 희망을 돌아본다'는 약속이라고 확신합니다. '해가 뜰 때까지/매일 까치발을 딛고 있다가'라는 표현에서 닭의 간절함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를 기다리는 마음은 무언가를 소망하는 마음입니다. 까치발을 딛고 서있는 것은 간절한 기다림이지요. 그리하여 닭이 얻은 것은 '들어 올려진 발가락 하나'입니다. 결국 이 발가락은 '수렁이나 철망'에 빠졌을 때 생을 연장할 버팀목이 됩니다.
'소중한 건 뒤편에 있다/ 뒤편이 되어주는 것이다' 마지막 연을 읽으니 자연스럽게 '백그라운드‘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백그라운드'는 태어나자마자 이미 결정된 (개인의) 배경이지요. 대개 백그라운드라고 하면 물질적, 경제적 배경을 많이 떠올리시겠지요. 일정 부분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요.
정말 그럴까요.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것만이 뒤편의 전부일까요. 저는 정말 가진 것 없는 집에서 태어났지만, 한 번도 저의 백그라운드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의심은커녕 백그라운드를 믿고 주저 없이 나아가는 삶을 살아왔어요. 제 백그라운드는 엄마를 비롯한 외가식구들의 사랑이었습니다. 언제나 뒤편이 되어주던 그분들이 계셨기에 수렁이나 철망에 빠지더라도 끝까지 버틸 수 있었어요.
"진아야, 잘 있제? 언제나 씩씩하게 잘 사는 모습 보니 삼촌은 참 좋다! 항상 응원한다!"
어제 아주 오랜만에 친정집에 오셨다는 삼촌과 통화를 했습니다. 삼촌의 투박한 진심에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네요. 마흔을 앞둔 저에게도 여전히 든든한 뒤편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제 아이들에게 그만큼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되고 있나 생각해 봅니다. 아이들이 자랄수록 아이들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볼 날이 더 많아지겠지요. 저를 뒤편에 두고 앞서 나아갈 두 아이가 '내 뒤에는 우리 엄마가 있다. 비바람 휘몰아쳐도 돌아갈 내 편이 있다' 확신하며 살아가가기를 바랍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닭의 며느리발톱처럼, 하등 의미 없는 존재처럼 여겨져도 꽤 괜찮은 삶일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