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몰아친 날

태풍(나희덕)

by 진아

[시 쓰는 여름] 서른다섯 번째 시


태풍(나희덕)


바람아, 나를 마셔라,

단숨에 비워내거라.


내 가슴속 모든 흐느낌을 가져다

저 나부끼는 것들에게 주리라.

울 수 있는 것들은 울고

꺾일 수 있는 것들은 꺾이도록.


그럴 수도 없는 내 마음은

가벼워지고 또 가벼워져서

신음도 없이 지푸라기처럼 날아오르리.


바람아, 풀잎 하나에나 기대어 부르는

나의 노래조차 쓸어가버려라.

울컥울컥 내 설움 데려가거라.


그러면 살아가리라.

네 미친 울음 끝

가장 고요한 눈동자 속에 태어나.


출처:<그녀에게>, 예경, 2015


며칠 전부터 이어진 초강력 태풍이 온다는 예보에 온 나라가 숨죽인 하루였습니다. 어제부터 내리는 비의 양이 심상치 않더니, 오늘 아침 집 가까이 흐르는 강이 범람해서 몇 개의 도로를 통제한다는 경보가 울렸어요. 다행히 태풍의 강도가 미리 예보된 '강'에서 '중'으로 조정되었지만, 여전히 태풍은 꽤 많은 비를 뿌리며 대한민국을 가로지르는 중이라고 합니다. 제가 있는 곳에는 늦은 오후부터 비가 그쳤지만, 바람은 곧 가을이 올 것처럼 차갑고 서늘합니다. 태풍의 여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여름밤이네요.


태풍이 온다기에, 이전에 골라두었던 목요일의 시를 잠시 넣어두고 태풍과 관련된 시를 열심히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제가 정말 좋아하는 나희덕 시인님의 '태풍'을 발견했어요. '태풍(나희덕)'의 화자는 마음속에 품은 울음을 태풍에 쓸어 보내고 싶어 합니다. 흐느낌과 울음, 설움을 모두 태풍의 거대한 비바람에 실어 보내고, 태풍이 지나간 고요한 자리에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고자 해요.


태풍이 몰고 오는 비는 평소에 만나는 비와는 결이 다릅니다. 태풍에는 으레 큰 비가 동반되지만, 태풍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것은 비가 아닌 '바람'입니다. 태풍이 몰아치는 날 창밖을 가득 채우는 소리는 빗소리라기보다는 바람소리에 가깝습니다. 비를 잔뜩 머금은 바람 소리는 누군가의 울음소리 아니, 누군가가 오열하는 소리에 가깝습니다. 추적추적도, 후드득도, 쏴아도 아닌, 하나의 의성어로는 표현조차 할 수 없는 태풍의 소리. 당장에라도 모든 것을 휩쓸고 가버릴 것 같은 거대한 바람의 소리. 바람의 오열에 나의 설음을 모두 토해낼 수 있다면, ‘태풍’의 마지막 연에서처럼 언제 그런 설움을 품고 살았냐는 듯 다시 고요해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태풍에 별일 없으셨나요. 모두 무사하고 안전한 하루이셨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마음에 말 못 할 설움, 묵혀 온 흐느낌을 지나가는 태풍에 모두 휘감아 보내시고, 내일은 좀 더 가벼워지시기를.


고요하고 안온해지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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