늪(정호승)
[시 쓰는 여름] 서른세 번째 시
늪(정호승)
지금부터
절망의 늪에 빠졌다고 말하지 않겠다
남은 시간이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희망의 늪에 빠졌다고 말하겠다
절망에는 늪이 없다
늪에는 절망이 없다
만일 절망에 늪이 있다면
희망에도 늪이 있다
희망의 늪에는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가득 빠져 있다.
출처:<밥값>, 창비.2010
일상이 불안에 잠식당하는 요즘입니다. 백화점을 가는 일도, 집 앞 거리를 걷는 일도, 차를 운전하는 일도, 학교에서 수업을 하는 일도..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너무도 일상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생명을 위협받는 일은 불안을 넘어 절망에 가까운 일입니다.
늪(정호승)은 다짐으로 시작하는 시입니다. ‘지금부터/ 절망의 늪에 빠졌다고 말하지 않겠다’ 단호하게 다짐합니다. 짐작건대 화자(시 속에서 말하는 이)는 지금껏 절망의 늪에 빠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겠지요. 더 이상은 절망하지 않겠다, 절망의 늪에서 벗어나겠다는 분명한 다짐입니다. ‘남은 시간이 /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다’라는 것은 그만큼 절박한 순간이란 말일 테지요. 생명의 위협을 감당해야 할 만큼, 절박하고 간절한 절망의 순간에 화자는 희망을 떠올려요. 절망할 순간에 희망을 노래하겠다고 단언합니다. 희망의 늪에는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가득 빠져 있’으니까요.
희망과 절망은 아득한 거리의 단어 같지만, 가만 보면 동전의 양면처럼 등을 맞댄 단어 같기도 합니다. 절망과 희망 사이에 차이점이라면, ‘사랑해야 할 사람들의 존재 유무‘뿐이에요. 어떤 순간에도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가득하다면 결코 절망할 수만은 없습니다. 지금은 희망적인 순간이라고 모두가 말해도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이 단 하나도 없다면 결코 희망적일 수 없고요.
늪은 아니지만, (늪과 유사한) 갯벌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 한 번 발이 빠지기 시작하자 어찌할 도리 없이 아래로 아래로 끌려 들어가던 그 기분, 빠져나오려 애쓰면 애쓸수록 더 강렬하게 빠져들던 감각. 갯벌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곁에 있던 친구의 손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같이 갯벌에 빠진 상황이었지만, 서로의 손에 의지해서 우리는 한 사람씩 발을 빼 올렸습니다.
부러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자꾸면 절망으로 발걸음이 내달리는 날들입니다. 이런 날들이 얼마나 더 계속될지, 과연 앞으로 다시 일상을 일상처럼 누리는 때가 올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주변을 돌아봐야 할 것 같아요. 함께 절망의 늪에 빠진 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 용기가 필요한 순간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함께 이 늪에서 나가자고. 함께 하는 이상, 우리의 늪은 더 이상 절망의 늪일 수 없다고. 이곳은 어쩌면 이미 희망의 늪일지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