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78주년 광복절입니다.

청포도(이육사)

by 진아

[시 쓰는 여름] 서른여덟 번째 시


청포도(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수건을 마련해두렴


출처: <이육사 시집>, 범우사, 2019



“엄마, 내일은 일본이 우리나라 돌려주고 돌아간 날이지?“


어제저녁밥을 먹는데 둘째 아이가 질문이라기보다는 ‘나 이런 것도 안다~!’는 느낌으로 말을 걸어왔습니다. 예전에 관련 책을 몇 번 읽어 준 적이 있는데 어제 어린이집에서 그 내용을 또 들었다고 했습니다. (어린이집 선생님 질문에 자기 혼자 답을 했다고 우쭐하는 모습이 귀여웠네요.^^) 둘째의 질문 아닌 질문에 첫째가 보란 듯이 답했어요.


“그래서 내일은 태극기 높이 달아야 하는 날이잖아. 기쁜 날이니까!”


두 아이가 말을 먼저 꺼낸 덕분에 어제저녁 잠들기 전까지 한참 동안 광복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직 두 아이 모두 발음이 어설퍼 ‘광복절’이라는 단어를 제대로 발음하기까지 몇 번을 따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두 아이의 지식은 얕지만, 책에서 읽었거나 기관에서 또는 저와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된 지식을 서로 뽐내며 광복절의 의미를 나누는 시간은 참으로 의미 있었어요.


“엄마, 태극기 달자!”

아침에 눈 뜨자마자 태극기를 달자는 성화에 태극기를 꺼냈습니다. 봉에 단단히 묶어 태극기를 게양하고, 첫째의 유치원 숙제인 태극기 그리기를 함께 했습니다. 그림 그리기를 너무도 싫어하는 첫째는 ‘우리나라 국기는 왜 이렇게 어렵게 생겼지, 독일처럼 색깔만 세 개면 좋은데’라는 7세 다운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열심히 태극기를 그렸습니다. 그렇게 일찌감치 숙제를 끝낸 아이들은 푹 쉬면서 공휴일을 즐겼어요.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학교를 졸업하고 엄마가 되기 전까지, 8월 15일은 여름휴가 같은 날이었습니다. 이날의 의미를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크게 새기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학창 시절에는 국기 게양이라도 했지만 졸업 후에는 해본 적이 없었고, 광복절이라고 해서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한 번 더 생각해 본 적도 솔직히 없었습니다. 엄마가 되어, 두 아이 덕분에 저 역시 광복절의 의미를 한 번 더 새기고 오랜만에 태극기도 꺼내 달아본 하루였어요.




‘청포도(이육사)’는 이육사 님의 시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이자, 여름만 되면 혹은 마트에서 청포도가 보이기만 하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시입니다. ’ 내 고장 칠월은 /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첫 연을 읊조리면 자동으로 다음 연이 재생될 만큼 좋아하는 시예요.


이육사 시인은 윤동주 시인과 함께 일제 강점 말기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입니다. 두 분은 국어 교과서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지는 시인이기도 한데요. 윤동주 시인이 ‘부끄러움, 참회, 자기반성’의 시를 많이 썼다면, 이육사 시인은 ‘투지, 의지, 저항‘의 시를 많이 썼습니다. 작품 활동 시기가 비슷하다 보니, 두 분의 시를 비교해서 가르치는 일도 많지요.


이육사 님이 남긴 많은 저항시 중에도 유명한 시가 정말 많지만, 저는 어쩐지 ‘청포도’라는 시에 마음이 기웁니다. ‘고달픈 몸‘으로 찾아올 ’손님‘을 기다리며, ’은쟁반‘과 ’하이얀 모시 수건‘을 준비하는 마음이 너무도 애틋해서요. 그(손님)‘이 오시기만 한다면, 잘 익은 포도를 한껏 따다가 ’두 손을 함뿍 적시며‘ 먹어도 좋겠다는 마음. ’함뿍‘이라는 부사어에는 담긴 화자의 간절함. 이 모든 표현에 마음이 가요.


나라의 독립을 기다리며 열일곱 번의 옥살이를 견디어낸 이육사 시인은, 해방 1년 전에 차가운 타국(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하셨습니다. ‘청포를 입고 찾아올 손님‘을 끝내 맞이하지 못한 채로요. 그와 같은 많은 분들의 희생으로, 우리는 ‘청포를 입고 찾아온 손님’을 맞이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육사 시인이 그토록 간절하고 애틋하게 기다렸던 ‘손님’을 이미 맞이한 세상을 잘 지켜나가고 있나 의문이 드는 밤입니다. 괜히 부끄러운 마음이 앞서는, 오늘은 제78주년 광복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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