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이 없으면 우리들은 쓰러진다지(이병률)
[시 쓰는 여름] 마흔네 번째 시
비밀이 없으면 우리들은 쓰러진다지(이병률)
인류의 모든 비밀은 쓰레기가 안고 있지
입다 버린 것
먹고 소화하여 물로 내린 것
쓰다 헤어진 것
주인을 잃은 그 모든 것들은
한쪽에 치워진 채
말을 걸기만 하면
모든 비밀을 쏟아낼 듯 궁리가 많지
그러고 보면 비밀은 밤에 피어나지 않지
습하고 어둑하고 후미진 곳에서 입으로 숨을 쉬지
얼마나 스스로의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비밀로 걸어 잠그었을까
사람은 자신의 비밀을 상세하게 닮아간다지
그 씨 한 톨마저 없으면 우리는 쓰러지지
자신을 설명할 길이 없지
나의 비밀을 남의 비밀에 포함시키기라도 하면서
한 묶음 두었다가
세계가 다시 따뜻해지면
심어질 필요는 있지
그렇게 비밀이길 비밀이길 바라면서
갑자기 싹으로 치솟지 않기를 바라면서
출처:<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문학동네, 2020
“엄마, 오늘 어린이집에서…….”
“엄마, 오늘 유치원에서…….”
만 4세, 만 6세인 두 아이는 서로 하루 일과를 더 많이 말하고 싶어 안달입니다. 첫째 아이는 조금 덜 한 편인데, 둘째 아이는 정말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다 들려주어요. 어린이집에서 자기를 불편하게 하는 친구 이야기, 친구와 다투어서 선생님께 혼이 난 이야기, 그날 했던 활동 내용, 점심에 나온 반찬, 오전 오후 간식까지. 시시콜콜하게 이야기를 해줍니다. 첫째도 둘째에 비해 덜 할 뿐, 또래 남자아이들에 비하자면 친구 관계나, 선생님과의 일화, 유치원 활동을 굉장히 상세하게 말해주는 편이에요,
두 아이에게 아직 ‘비밀’은 없습니다. 가끔 두 아이 중 한 아이를 데리고 맛있는 것을 먹거나, 한 명에게만 무언가를 사주는 일이 생기면 “이건 오빠(동생)한테 비밀이야,” 아무리 다짐을 해도 결국 서로에게 다 터놓고 맙니다. 아직은 비밀이 주는 효용보다는, 비밀로 인한 불편(뭔가를 감추는 데서 오는 죄책감?)을 더 크게 느끼는 것 같아요.
‘비밀이 없으면 우리는 쓰러진다지(이병률)’는 제목에 고스란히 드러나듯이, 비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비밀이 없으면 쓰러진다는 것으로 보아, 모두에게 비밀은 꼭 필요한 것이며 지켜야 하는 것으로 그려질 것 같아요.
1연과 2연에서는 비밀이 쓰레기 속에 있다고 합니다. 남겨진 것들에는 우리의 비밀이 속속들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버렸다고 생각하지만 쓰레기는 ‘말을 걸기만 하면 /모든 비밀을 쏟아낼 듯 궁리가 많’아요. 1,2연을 읽으며 드라마나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신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누군가의 비밀을 캐내는 사람들은 꼭 그 집에서 나온 쓰레기를 뒤집니다. 3연의 내용처럼 비밀은 ‘습하고 어둑하고 후미진 곳에서 입으로 숨을 쉬‘고 있어요. 비밀을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표현한 것이 참신하지요!
4연은 질문처럼 쓰였지만, 답을 구한다기보다는 자기 안으로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비밀로 걸어 잠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표현 같아요. 안으로 들어가자면 타인이 열 수 없는 열쇠로 자기를 잠가야 하니까요. 그게 바로 비밀 아닐까요. 누구도 열 수 없는 나만의
비밀! (하지만 비밀로 너무 꽁꽁 잠가버린 채 자기 안으로만 침작하면, 곁에 있는 이들은 좀 아플 것 같아요.
이럴 때 “얼마나 스스로의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비밀로 걸어 잠그었을까!”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우리는 모두 자기 ‘비밀을 닮아’갑니다. 내가 만든 비밀은 나에게 가장 은밀한 부분이에요. 당연히, 나의 깊은 자아와 맞닿아 있습니다.(5연) 비밀이 없으면, 즉 모두에게 나의 아주 섬세하고 은밀한 부분까지 다 밝혀진다면 우리는 ‘쓰러질지도’ 몰라요.(6연) 그러니 모른 척 남의 비밀과 한 묶음으로 묶어 조용히 두었다가 ’세계가 다시 따뜻해지면/심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7연) 여기서 따뜻해지면 심어진다는 것은, 앞서 비밀을 ‘씨 한 톨’에 비유했기 때문일 거예요. 씨는 봄이 오면 심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니까요.
마지막 8연이 저에게는 반전이었어요. 씨는 싹이 나야 하는데, 그게 씨의 본질적 존재 이유인데 8연에서는 땅에 묻은 씨에서 싹이 나지 않기를, 즉 비밀이 영원히 비밀이기를 바랍니다. 비밀은 영원히 알려지지 않을 때 온전히 비밀다울 수 있으니까요.
오늘 시는 길이도 좀 있고 비유적 표현도 상당해서 시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좀 길어졌어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저희 집 두 아이에게는 아직 비밀이 없지만, 자랄수록 제가 결코 알 수 없는 비밀이 생기겠지요. 그렇게 사춘기를 맞이하고 성인이 될 겁니다.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마음 하나쯤 가지고서요. 그러고 보면 자란다는 건, 비밀이 생긴다는 것과 유사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정말 그러하다면, 아이들에게 생길 비밀이 무겁고 슬픈 것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영원히 싹 틔우지 않을 비밀이, 스스로를 더 자기답게 만들어줄 비밀이, 자기가 닮아갈 비밀이, 생각하면 설레고 두근거리고 행복한 것이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또 바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