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김사인)
[시 쓰는 가을] 일곱 번째 시
공부(김사인)
‘다 공부지요’
라고 말하고 나면
참 좋습니다.
어머님 떠나시는 일
남아 배웅하는 일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 하고 계십니다’
말하고 나면 나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무릎 꿇은 착한 소년입니다.
어디선가 크고 두터운 손이 와서
애쓴다고 머리 쓰다듬어주실 것 같습니다.
눈만 내리깐 채
숫기 없는 나는
아무 말 못 하겠지요만
속으로는 고맙고도 서러워
눈물 핑 돌겠지요만.
날이 저무는 일
비 오시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바람 부는 일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로는 그 곁에 골똘히 지켜섰기도 하는 일
‘다 공부지요’ 말하고 나면 좀 견딜 만해집니다.
출처: <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시선, 2016
지금 고등학교는 2학기 중간고사 시험기간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무엇일까요? 아마 단번에 맞히셨을 것 같은데요. 바로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혹은 "공부 많이 했니?" 그것도 아니면 "공부 잘 되어가?"입니다. 아이들은 '공부'에 'ㄱ'자만 들어도 몸서리를 쳐요. 생각해 보면, 살아가는 동안 학창 시절의 시험 기간만큼 단기간에 몰입해서 공부를 하는 일도 없는 듯해요. 풀고 외우고, 풀고 외우다 보면 내가 공부를 하는 건지 공부가 나를 집어삼키는 건지 모호해질 때가 옵니다. 그때쯤이면 잘 쳤든 못 쳤든 시험은 끝이 나요.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까지 성공하고 나면, 더 이상은 공부할 일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적어도 십 대 때는 그랬어요. 어른이 되고 돈벌이를 하기 시작하면 공부는 쳐다보지도 않으리라 다짐했지요. 그런데 진짜 공부는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회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일부터 시작해서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리는 일이 모두 공부였습니다. 사람과 업무 사이에서 내 마음을 지키는 일도,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어가는 일도 모두 공부였어요.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공부는 오늘의 시 '공부(김사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을 담대하게 받아들이는 일이었습니다.
내 몸에서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어 세상에 빛을 보는 일은 마음으로만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끝없이 공부가 필요했어요. 육아서를 읽고 교육서를 읽는 공부가 아니라, 내 아이를 온전히 독립된 개체로 바라보는 연습과 아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연습이 모두 공부였어요. 누군가 오는 일은 그래도 나았습니다. 새로 온 생명은 언제나 빛을 몰고 와서 삶의 후미진 곳까지 환하게 밝혀주었으니까요.
누군가 가는 일은 좀 달랐습니다. 삶의 빛을 단번에 꺼트리는 바람과 같았어요. (운이 좋은 것인지) 저는 아직 가까운 분 중 할아버지밖에 보내드리지 않았는데요. 오랫동안 할아버지 그늘에서 자랐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가시는 길을 바라보는 마음이 쉽지 않았어요. 세상에 있던 존재가 없는 존재가 되는 일, 내 과거에 큰 의미였던 존재가 내 미래에는 존재하지 않는 일, 기억은 생생한데 실체는 없는 일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깊고 오랜 마음공부가 필요했습니다.
아직 저에게는 위로 할머니와 엄마가 남아계셔요. 좀 더 넓게 보면 이모와 이보무, 삼촌과 숙모들도 계시고요. 시부모님도 계시고 시댁 식구들도 있습니다. 아래로는 제 동생을 비롯한 친척 동생들도 있어요. 이것보다 더 넓게 생각해 보면 저와 마음을 나누고 시간을 함께 했던 숱한 인연들이 있지요. 때는 알 수 없지만,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필연적으로 길을 떠날 것이고, 그때마다 남은 이들은 공부하는 마음으로 이별을 배워야겠지요.
그러고 보니, 공부의 'ㄱ'자도 꺼내지 말라는 아이들은 생에 가장 쉬운 공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지금 아이들이 하는 공부는 풀고 외우고 풀고 외우다 보면 답이 나오는 공부니까요. 아이들에게도 진짜 공부는 답이 없는 만남과 이별을 배우는 공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날이 오겠지요. 그때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닐 겁니다. 이런 말을 하면 아이들이 너무 싫어하겠지만, 그나마 답이 있는 공부에 매달리는 지금의 아이들이 조금 부러워지는 밤입니다.
*위에서 소개해드린 '공부(김사인)'가 실려 있는 <어린 당나귀 곁에서>에는 '고비사막 어머니'라는 시가 함께 실려 있습니다. 이 시도 함께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 남겨드려요. 오늘밤은 엄마 생각이 더 많이 날 것 같네요.
고비사막 어머니(김사인)
1
잘 가셨을라나.
길 떠나신 지 벌써 다섯해
고개 하나 넘으며 뼈 한자루 내주고
물 하나 건너면서 살 한줌 덜어주며
이제 그곳에 닿으셨을라나.
흙으로 물로 바람으로
살과 뼈 터럭들 제 갈 길로 보내고
당신만 남아 잠시 호젓하다가
아니, 아무것도 아닌 이게 뭐지, 화들짝 놀라시다가
그 순간 남은 공부 다 이루어
높이 오른 연기처럼 문득 흩어지셨을까.
2
어디 가 계신가요 어머니.
이렇게 오래 전화도 안 받으시고
오늘 저녁에는 돌아오세요.
콩국수를 만들어주세요.
수박도 좀 잘라주시고
제 몫으로 아껴둔 머루술도 한자리 걸러주세요.
술 잘하는 아들 대견해하며, 당신도 곁에 앉아 찻숟갈로 맛보세요 나는 이렇게만 해도 취한다 하시며.
어머니, 머리도 좀 만져봐주세요 손도 좀 잡아주세요 그래, 너희는 살기 안 힘드니, 물어봐도 주세요.
너 피곤한데 내가 자꾸 붙잡고 얘기가 길다, 멋쩍게 웃으시며, 그래도 담배 하나 더 태우고 건너가세요 어머니.
3
혹시 머나먼 고비사막으로 가셨나요 어머니는.
낙타들과 놀고 계시나요.
꾀죄죄한 양들을 돌보시나요.
빨갛게 그을은 그곳 아낙들의 착한 수다 들어주고 계시나요.
그럼 저는 어디로 흘러가야 할까요.
꼭 당신을 다시 만나자는 건 아니지만
달아나는 돌들과 자꾸만 뒤로 숨는 풀들과
봉분 위로 부는 바람 하나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어머니 가시고도 밥솥의 밥은 따뜻하고
못난 아들 형과 나는 있고
아이들은 눈싸움을 조르고
어머니 가시고도 꽃 피고 잎 지고
꺼끄러운 수염은 자라고
술도 있고요.
그곳은 그곳대로
모쪼록 그러하시길.
출처: <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시선,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