굵은 비 오는 날(최정)
[시쓰는 가을] 여덟 번째 시
굵은 비 오는 날(최정)
비가 내리면 감상에 빠져 오전 강의를 제치고 낡은 주점 문을 두드리던 시절
겨우 눈곱 뗀 아주머니 눈 흘김이 빗소리에 목을 타고 들어가는 막걸리처럼 좋았다
얼굴 유난히 까맣던 동기 녀석은 운동장으로 뛰쳐나가 소리를 지르며 빗속을 달리곤 했다
그런 녀석이 와이셔츠 단추 자락으로 뱃살 삐져나오는, 애 아빠가 되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철 좀 들었는지 우비를 입고 밭에 나간다 한 달 만에 오는 귀한 비 맞으며 어린 들깨를 심는다
어디로든 튕겨 나가고 싶어 끓어넘치던 시절이 빗물로 뚝뚝 흘러내린다 파릇파릇한 들깻잎에 선명하게 굴러 내린다
오랜 벗을 불러 막걸리라도 한 사발 하고 싶은데 첩첩산중 굽이굽이 돌고 돌아야 하는구나 들깨 향에 먼저 취해 빗방울이 점점 굵어진다
출처: <푸른 돌밭>, 한티재 시선, 2019
아침만 하더라도 제가 있는 곳은 흐리기만 했는데 오후부터는 장대비가 쏟아지네요. 오늘 비 예보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고른 시였는데, 정말이지 ‘굵은 비’가 오는 날과 꼭 어울리는 시가 되었습니다.
‘굵은 비 오는 날(최정)‘은 과거의 어느 시절을 그리워하는 시입니다. 괜히 비가 내리면 감상에 빠지던 시절, 강의를 제치고 막걸리를 마셔도 낭만으로 묘사되던 시절, 우산 없이 빗속을 달려도 추억으로 미화되던 시절, ’어디로든 튕겨 나가고 싶어 끓어 넘치던 시절‘을요. 지금은 그 시절에서 꽤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비가 오면 감상에 젖을 틈이 없어요. 오랜만에 내리는 귀한 비를 반가워하며, 우비를 입고 밭에 나가 어린 들깨를 심어야 합니다. ’오랜 벗을 불러 막걸리라도 한 사발하고 싶‘지만 ’나‘와 벗은 물리적으로 너무 먼 곳에 있어요.
떠오르는 시절이 있으신가요. 어디로든 튕겨 나가고 싶어 끓어 넘치던 시절이요. 저는 있습니다. 갓 대학생이 되고 처음으로 주거지 근방에 있던 친구들이 아닌, 완전히 새롭고 낯선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전공이 같다는 건, 관심사가 비슷하다는 말이기도 했어요.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너무나 다른 친구들이었지만, 우리는 ‘같은 전공’을 택했다는 것만으로 금세 가까워졌습니다. 그런 우리를 더 끈끈하게 이어준 것은 어른이 되었다는 해방감과 자유, 그리고 술이었어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나 수업을 듣고 시험을 치는 건 매한가지였습니다. 대학 첫 학기는 사실상 선배들이 짜준 시간표대로 움직였기 때문에 수강신청의 자유도 크게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매일 체감하는 큰 차이가 있었으니, 바로 술집에 당당하게 입성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합법적으로 술을 구매하고 마실 수 있다는 건, ‘정말 내가 미성년을 벗어나 성년이 되었구나’ 느끼게 하는 일이었어요.
별다른 이유도 없이, 예를 들면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으니까 따위를 이유 삼아 친구들과 강의를 제치고 막걸리를 마시러 갔습니다. 비 오는 날이면 학교 앞 전통주점에서 파전에 과일소주를 마셨어요. 약속이나 한 듯이 뒤따라 들어오는 학과 친구들을 보며 판이 커지는 일도 일상다반사였습니다. 날씨가 선선하고 좋다는 이유로 학교 운동장 계단에 앉아 맥주를 마시기도 하고, 꼭 눈이 올 것 같다는 이유로 어묵탕에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대학 앞에나 있던 욕쟁이 할머니가 걸쭉한 욕설로 맞아주던 술집도, 지하 계단을 내려가면 미스터리한 주인아저씨가 기막히게 맛있는 찌개를 안주로 내어주시던 술집도, 알바비나 용돈을 받아 주머니가 꽤 두둑해질 때면 찾아갔던 수제 맥주집도, 학과 선배들 때부터 대대로 내려오던 우리 과의 단골 술집도 모두 선명히 기억합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술만 마신 게 아니었어요. 첫사랑의 두근거림을 느꼈고, 실연의 아픔을 달랬습니다. 어려운 가정사를 힘겹게 털어놓았고, 서로의 어깨에 놓인 짐을 함께 나눠지기도 했어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애써 담담히 나누기도 하고, 결국에는 희망적인 결론으로 건배를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떠올려 보면, 친구들과 함께 술잔을 주고받을 때면 위태로운 사랑도, 현재도, 미래도 쉬이 잊히고 끝내는 웃고 노래하고 떠들 기운이 샘솟았던 것 같아요.
십오 년이 훌쩍 넘은 추억들입니다. 이제는 모두 저마다의 생활에 바빠 몇 년에 한 번씩 얼굴을 볼까 말까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각자의 생활 반경이 너무도 달라진 데다, 자기 하나만 책임지면 되던 이십 대 초반과 달리 책임져야 할 사람도 일도 많아졌어요. 소소한 안부를 물을 겨를조차 없이 일상은 바쁘고 고단합니다. 그러나 매일 얼굴을 맞대고, 이런저런 이유를 핑계 삼아 술잔을 기울이던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제 안에는 그들과 함께 했던 과거의 시간들이 돌탑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습니다. 덕분에 지금의 제 마음은 단단한 석탑처럼 비바람에도 쉬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어요.
굵은 비가 계속해서 쏟아지는 밤입니다. 저와 추억을 공유하는 그 친구들은 오늘 밤도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생을 살아가고 있겠지요. 더는 ‘비가 온다’라는 핑계로 오늘 해야 할 과업을 내팽개치지 못할 만큼 나이를 먹은 우리는, 지나간 시간을 안주 삼아 저마다의 술잔을 기울입니다. 더는 같은 공간이 아닌 각자의 공간에서. 같은 시간이 아닌 각자의 시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