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로하는 날(이해인)
[시쓰는 가을] 아홉 번째 시
나를 위로하는 날(이해인)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내가 나를 위로할 필요가 있네
큰일 아닌데도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죽음을 맛볼 때
남에겐 채 드러나지 않은
나의 허물과 약점들이
나를 잠 못 들게 하고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부끄러움에
문 닫고 숨고 싶을 때
괜찮아 괜찮아
힘을 내라구
이제부터 잘하면 되잖아
조금은 계면쩍지만
내가 나를 위로하며
조용히
거울 앞에 설 때가 있네
내가 나에게 조금 더
따뜻하고 너그러워지는
동그란 마음
활짝 웃어주는 마음
남에게 주기 전에
내가 나에게 먼저 주는
위로의 선물이라네
출처:<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 열림원, 2008
저는 저에게 무척 엄격한 편입니다. 어릴 땐 몰랐는데, 자라고 나서 생각해 보니 어릴 때부터도 그랬던 것 같아요. 친구들과 실컷 놀고 나서도 시험이 걱정되어 밤을 새 공부를 했었어요. 성적 스트레스로 호흡 곤란을 일으켜 응급실에 실려간 것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뭐 하나를 해도 잘 해내고 싶어서 매사에 예민하게 굴기도 했지요. 지금 떠올려보면 모두 자신에게 엄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나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항상 지금보다 더 나아져야 한다고 채찍질했기 때문이었어요.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어요. 실수하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무엇이든 완벽하게 준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나의 허물과 약점이 들통날까 봐 전전긍긍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겉으로는 굉장히 대범한 척했지만, 그게 '척'일 뿐이라는 건 제 자신이 가장 잘 알았어요. 그렇게 아등바등해서 뭐든 잘 해냈다면, 마음은 덜 힘들었겠지요.
삶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더군요.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여기저기서 실수가 생겼어요.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균열이 일어나기도 했고요. 그럴 때마다 저를 탓했습니다. 그때 좀 더 했어야지, 그때 그만 멈췄어야지, 원망할 사람은 저 자신뿐이었어요. 스스로에게 더 엄격해졌습니다. 더 잘 감춰야 한다고, 더 잘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글쓰기를 하면서 저는 저를 위로하는 방법을 배웠어요. '큰일 아닌데도/세상이 끝난 것 같은/죽음을 맛볼 때' , '나의 허물과 약점들이/나를 잠 못 들게' 할 때,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부끄러움에/문 닫고 숨고 싶을 때' 예전이었다면 골방에 숨어들어 스스로를 원망하여 우는 것밖에는 못했을 거예요. 지금은 아닙니다. 골방에 숨어드는 것은 똑같지만 더 이상은 필요 이상으로 자책하지 않아요. 대신 골방에 앉아 글을 씁니다. 일기를 쓰기도 하고, 누군가 읽어주길 바라며 공개된 공간에 글을 쓰기도 해요. 좋은 책을 읽으며 마음을 울리는 문장 곁에 작은 글씨로 마음을 쏟아내기도 합니다.
흰 종이 위에서만큼은 스스로에게 세웠던 엄격한 잣대를 내려놓고, '내가 나에게 조금 더/따뜻하고 너그러워지는/동그란 마음/활짝 웃어주는 마음'을 가득 줍니다. '괜찮아 괜찮아/힘을 내라구/이제부터 잘하면 되잖아' 종이 가득 쓰고 나면, 남에게 위로받은 것보다 더 깊고 진한 위로가 파도처럼 밀려와요.
오늘도 곁에 있는 이들은 쉽게 위로하면서, 스스로에게는 엄격하지 않으셨나요? "괜찮아, 괜찮아. 힘을 내라구. 이제부터 잘하면 되잖아." 남들에게는 너무도 쉽게 하는 말이지만 어쩐지 나에게는 차마 꺼내놓기 민망해하지 않으셨나요?
이 밤, 잠들기 전 스스로에게 꼭 말해주세요.
"괜찮아, 괜찮아. 힘을 내라구. 이제부터 잘하면 되잖아."
*같은 시집에 함께 읽으면 좋은 시가 있어 오늘도 한 편 더 놓아드립니다. 남에게는 그렇지 않은데 저에게는 인색했던 지난날을 떠올리게 하는 시였습니다. 아무쪼록! 스스로를 가장 사랑하시길!
어떤 후회
- 이해인
물건이든
마음이든
무조건 주는 걸 좋아했고
남에게 주는 기쁨 모여야만
행복이 된다고 생각했어
어느 날 곰곰 생각해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것 같더라구
주지 않고는 못 견디는
그 습성이
일종의 강박관념으로
자신을 구속하고
다른 이를 불편하게 함을
부끄럽게 깨달았어
주는 일에 숨어 따르는
허영과 자만심을
경계하라던 그대의 말을
다시 기억했어
남을 떠먹이는 일에
밤낮으로 바쁘긴 전에
자신도 떠먹일 줄 아는 지혜와
용기를 지녀야 한다던 그대의 말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기억했어
출처:<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 열림원,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