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정일근)
[시쓰는 가을] 열 번째 시
벼랑(정일근)
벼랑은 더 내려갈 수 없을 때 나타나는 것 아니다
벼랑은 더 오를 수 없을 때 나타난다
삶이 썩은 생선 내장 같은 바닥을 칠 때
더 이상 내려갈 곳 없어 죽어야겠다고 결심할 때
아직 당신은 벼랑을 보지 못했다
벼랑은 피해 가는 벽이 아니다
벼랑은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 벽이다
벼랑은 오르지 못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다
벼랑은 벼랑에서 떨어져 본 사람의 것이다
당신이 벼랑에 서본 적이 있다고 말할 때
그곳에서부터 한없이 추락하여야만 만날 수 있는
당신의 진짜 벼랑이 있다
출처: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문학과 지성사, 2009
벼랑 끝에 선 것 같은 기분. 느껴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있습니다. 첫 임용 시험에 떨어졌던 날. 제 이름 석 자 뒤에 ‘불합격’ 세 글자를 봤던 날. 그때 제 나이는 스물일곱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어린 나이지만, 그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어요. 대학을 졸업한 친구들이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삼 년쯤 됐을 때였으니까요.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했다가 뒤늦게 임용을 치느라 스물여섯 겨울에 첫 시험을 쳤습니다. 워낙 경쟁률도 높고 어려운 시험이라 한 번에 합격하리라 기대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막상 불합격이라니 앞이 깜깜하더군요.
모아둔 돈 같은 건 있을 리 없었어요.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대학원까지 다녔으니 학자금 대출만 잔뜩 있었지요. 갚아야 될 돈은 몇 백인데, 시험에는 떨어졌고 나이는 이십 대 후반이었습니다. 엄마는 여전히 백화점에서 판매직으로 일하고 계셨고, 하나뿐인 동생은 대학교 4학년이었어요. 모든 상황이 저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느낌이었습니다.
속은 타들어갔지만 티를 내지 못했습니다. 내가 불안해하면, 불안해하는 걸 들키면 정말로 벼랑에서 떨어져 버릴 것 같았거든요. 대담한 척, 이 정도 일은 별일이 아닌 척했습니다. 저와 함께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을 엄마에게는 더욱 담대하게 행동했어요.
도저히 집에서 학교를 오가며 공부를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왕복 두 시간의 통학 거리도 거리였지만, 돌이켜보면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을 엄마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때까지 엄마 품을 떠나본 적 없던 저는 선언하듯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나 딱 1년만 진짜 열심히 공부해보고 싶어. 학교 기숙사에서 살면서 공부해 볼게."
당시 제가 다녔던 대학교에는 졸업생들이 들어갈 수 있는 기숙사가 있었어요. 기숙사에 합격만 한다면 후회 없이 공부해 보리라 마음먹었지요. 대학 내내 11시 통금을 고수하던 엄마도 어쩐 일인지 오래 고민하지 않으시고 허락해 주셨어요.
다행히 기숙사에 합격했고, 그 해 일 년 동안 정말 죽을힘을 다해 벼랑에 매달렸습니다. 죽기 살기로 공부했어요. 새벽에 일어나 도서관에 갔고, 하루 종일 책과 씨름했어요. 그 흔한 전공 인터넷 강의 하나 듣지 않으며, 오로지 전공 책과 기출문제를 파먹듯 공부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에 가위눌리고, 악몽을 꾸는 바람에 소리를 지르며 깨는 밤이 많았지만 버텼습니다. 당장 이 벽의 꼭대기에 오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더 아래로 추락하지 않겠다는 나름의 비장함이 있었던 것 같아요.
'벼랑(정일근)'을 읽다 보니, 스물일곱의 제가 서 있던 곳은 어쩌면 벼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 내려갈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열심히 올라서겠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은 결코 벼랑 끝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죽기 살기로 매달린 벽'이었어요.
그때의 에너지가 저를 많이 바꾸어 놓았습니다. 당시에는 '삶이 썩은 생선 내장 같은 바닥을 칠 때'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삶이 나를 튀어 오르게 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제가 선 곳을 벼랑이라고, 더는 내려갈 수 없다고, 피해 가고만 싶다고 생각했다면 아마 지금의 제 모습으로 살지 못했을 거예요.
떨어져야만 오를 수 있다고 합니다. 모르지 않지만, 떨어지는 것은 누구나 두렵습니다. 그래도 떨어지는 때는, 벼랑 끝에 선 듯 불안하고 두려운 때는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벼랑(정일근)'의 말을 빌려, ‘여기서 떨어지면 모든 것을 잃을 거야, 죽고 말 거야’, 생각하는 그곳은 진짜 벼랑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죽기 살기로 매달려 오르다 보면, 언젠가는 튀어 오르는 순간이 와요. 현실과는 거리가 먼, 너무 낭만적인 이야기처럼 들리시나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삶은 때론 절망적이지만, 우리는 끝내 이 삶을 살아내야 하는걸요.
오늘 글은 아무래도 너무 무거운 것 같아, 조금 가뿐한 시를 하나 더 놓아드려요. 지금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 같다면, 이 동력으로 튀어 오르리라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 떨어져야 튀어 오르는 공처럼, 바닥을 친 것 같을 때 온마음에 힘을 주고 한 번 더 튀어 올라보시길!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정현종)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
살아봐야지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탄력의 나라의
왕자처럼
가볍게 떠올라야지
곧 움직일 준비되어 있는 꼴
둥근 공이 되어
옳지 최선의 꼴
지금의 네 모습처럼
떨어져도 튀어 오르는 공
쓰러지는 법이 없는 공이 되어
출처: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