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부정할 수도 없던 당신께

얼굴도 흐릿한 당신께 쓰는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

by 진아

내일이 어버이날이네요. 어버이날에는 언제나 엄마에게만 편지를 써왔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태어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신께 편지를 써보려 합니다.


부모 중 한쪽 혹은 양쪽이 없는 가정을 내가 어렸을 때는 결손가정이라고 불렀어요. 당신께서 엄마와 나, 동생에게 한마디 인사도 없이 그렇게 떠난 이후로 나와 동생은 결손가정의 아이가 되었어요. 누구도 대놓고 우리에게 결손가정이라고 칭하지는 않았지만 일찍 철이 든 나는 알았어요. 결손이라는 단어에 지워진 편견의 무게가 꽤 무겁다는 것을요. 그래서였을까요. 엄마는 세상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 되어 우리를 엄하게 키우면서도 무엇이든 부족하지 않게 해 주려고 갖은 고생도 마다하지 않으셨어요.


그 덕분에 자라면서 제일 많이 들은 말이 "넌 어떻게 그렇게 잘 자랐니?"였어요.

내가 만난 모든 어른들이, 친구들이, 하물며 후배들까지도 내가 아빠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하나같이 하던 말이었어요. 그들도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그 말에는 부모 중 한 사람이 없는, 나의 경우에는 아빠가 없는 가정의 아이는 건강하게 잘 자라기 어렵다는 전제가 깔려있었어요. 그늘 없이 잘 자란 나에 대한 칭찬이었겠지만 아빠가 없으면 나쁜 길로 빠지는 게 도리어 당연하다는 듯한, 그 칭찬의 말이 그다지 반갑지 않았어요. 그 말은 아빠의 빈자리를 느끼지 않고 살도록 평생을 고군분투한 엄마의 세월에 생채기를 내는 말 같았거든요.


다행히도 엄마 주변에는 당신이 아니더라도 엄마를 지켜줄, 또 나와 동생의 아빠가 되어줄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오갈 데 없는 우리 셋을 온기 가득한 집으로 데려와 품어주셨고, 삼촌과 이모는 물론이거니와 숙모와 이모부까지 모두 한 마음으로 우리 둘을 사랑해주셨어요. 사랑 덕분에 우리는 당신의 빈자리조차 모르고 살았고, 그러니 왜 우리에겐 아빠가 없을까 궁금해하지도 않았어요. 당신께서는 그냥 처음부터 없던 사람이었죠.




누가 그런 질문을 하더라구요. 아빠가 밉지 않냐구요. 그런데 정말 맹세코 단 한 번도 당신이 미웠던 적이 없어요. 그랬으니 원망도 없었죠. 어렸을 땐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난 당신께 미움과 원망이 전혀 들지 않을까 스스로도 의아했었어요. 이제 와 생각해보니 미움이나 원망도 결국에는 사랑에서 시작되는 감정이더군요. 처음부터 우리에게 당신은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니 사랑할 일도, 미워할 일도 없었던 거였어요.


그런 면에서 엄마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엄마는 우리 앞에서 일절 당신에 대한 비난을 한 적이 없어요. 우리에게 당신은 미움의 대상이 아니었지만 엄마에게는 엄마의 청춘을 고스란히 앗아간 나쁜 사람이었을 텐데 우리를 키우는 내내 단 한 번도 당신에 대한 나쁜 말을 하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내가 글쓰기 대회에서 상을 받아왔던 날, "너희 아빠가 연애편지를 잘 썼었는데 네가 그걸 닮았나 보다."라며 칭찬 아닌 칭찬을 하셨죠. 내가 말하기 대회에 나간다고 했을 때도, 학급 간부가 됐을 때도 당신을 닮아 말도 잘하고 나서기도 좋아한다고 하셨어요. 엄마가 당신을 미워하는 마음을 우리에게 드러내지 않으니 우리는 당신을 미워할 명분이 없었어요.


엄마는 오히려 당신께 고마워했답니다. 나와 동생, 우리 자매의 양육권을 욕심내지 않았던 당신께 고마웠대요. 우리 둘을 키울 의사가 전혀 없던, 그 단호함이 엄마를 이날 이때까지 당신을 덜 미워하며 살 수 있었던 이유였다네요. 내 입장에서는 철저히 버림받은 것에 대해 씁쓸할 법도 하지만, 당신께 미안할 만큼이나 다행스러운 마음만 들어요. 그때 우리 자매에 대한 양육권을 당신이 가져갔더라면 나와 동생은 정말 불행한 삶을 살았을 테니까요. 그렇게 당신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우리 곁을 떠나 준 덕분에 우리는 오히려 외가 식구들 모두에게 누구와도 비할 수 없는 큰 사랑을 받으며 몸도 마음도 건강한 어른으로 잘 자랐답니다.


아, 나도 당신께 감사한 일이 하나 있어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서 모든 아이들을 편견 없이 대할 수 있게 되었거든요. 부모님 중 한 분이 안 계시거나 두 분 다 안 계신 아이들을 만나더라도 아무런 편견 없이 그 아이들을 대할 수 있는 교사가 되었어요. 그런 아이들 중에 보석처럼 빛나게 잘 자란 아이들이 정말 많거든요. "넌 어떻게 그렇게 잘 자랐니?"라는 질문 대신에 "엄마가, 혹은 아빠가 혼자서 고생하셨겠다. 너를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로 키우시느라."라고 말해줄 수 있게 되었어요.

그리고 부모님들의 잘못으로 일탈과 비행을 일삼는 아이들을 미워하기보다는 안쓰러워하며 품어줄 수 있는 교사가 되었구요. "엄마 아빠의 일은 너의 잘못이 아니란다. 그분들도 최선의 선택을 하신 거야. 너는 너의 삶을 놓지 말았으면 좋겠다"라며 아이의 어깨를 두드려줄 수 있게 되었어요.




삼십칠 년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편지로 마음을 전하는 일을 취미로 삼고 살았는데, 당신께는 이 편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예요. 언젠가 한 번은 하고 싶었던 말들을 모두 쏟아내고 나니, 당신과 나를 혈연이라는 이름으로 아슬아슬하게나마 잇고 있던 끈이 툭하고 끊어진 느낌마저 드네요. 그런데 그 느낌이 아쉬움이 아니라 후련함이라는 사실이 조금은 씁쓸하긴 합니다. 이 편지는 당신께 쓰는 유일한 편지이기도 하지만, 당신께서 없던 세월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를 키워준 엄마에 대한 자랑이기도 해요.


그러니 혹여 우리에게 일말의 미안함이나 죄책감이 있으셨다면 다 잊으시고 당신께서도 당신의 삶을 건강히 잘 사셨으면 해요. 그렇게 우리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요. 처음부터 그랬듯 서로의 삶에서 없었던 사람으로, 그래서 그리운 마음도 품을 틈 없던 사람으로 당신께서는 당신의 삶을 나는 나의 삶을 열심히,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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