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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바다

바다 1(정지용)

by 진아

[시쓰는 가을] 스물여덟 번째 시


바다 1(정지용)


오•오•오•오•오• 소리치며 달려가니

오•오•오•오•오• 연달아서 몰아온다.


간밤에 잠 살포시

머언 뇌성 울더니,


오늘 아침 바다는

포도빛으로 부풀어졌다.


철석, 처얼석, 철석, 처얼석, 철석,

제비 날아들 듯 물결 사이사이로 춤을 추어.


출처: <정지용 시집>, 범우사, 2020


바다 좋아하시나요? 나이를 먹을수록 산을 좋아하게 된다고 하던데, 아직도 바다가 이렇게 좋은 걸 보면 좀 더 자라야 하나 봅니다.^^ 어쨌든 제게 바다는 생각만 해도 좋은 곳,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감정의 먼지를 조금은 털어낼 수 있는 곳입니다.


바다가 보고 싶은 마음에 골라본 오늘의 시는 '바다 1(정지용)'입니다. 마치 파도치는 바다가 눈앞에 보이는 듯한 시인데요. 현대시가 태동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30년대에 쓰인 시인데, 바다를 어쩜 이렇게 역동적이고 문학적으로 묘사했는지 참 놀랍습니다. '간밤에' '머언 뇌성 울더니', '오늘 아침 바다는/포도빛으로 부풀어졌다'는 것으로 보아, 오늘의 바다는 고요하고 잔잔한 바다가 아닙니다. 간밤에 멀리서 울리던 천둥 번개가 오늘의 바다를 덮쳐, 큰 파도를 일으킨 격동적인 바다예요.


바다를 떠올리다 보면 제 유년기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제 고향은 부산입니다. 집이 바다 바로 곁은 아니었지만, 버스로 십오 분 거리에 바다가 있었어요. 해운대나 광안리만큼 알려진 바다는 아니었어도 마음만 먹으면 금세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바다가 있다는 건 축복이었습니다. 마침 친한 친구가 그 근처에 살아, 그 핑계로 자주 바다를 찾았어요. 친구와 바닷가에 앉아 먹는 햄버거에서는 바다 맛이 났습니다. 함께 마셨던 코코아에는 초콜릿 향 대신 바다 향이 났어요. 그 바다에서 우리는 참 많은 이야기와 마음을 나누었지요.


가까이에 있는 바다도 좋았지만 가끔은 좀 더 너른 바다가 필요했어요. 해변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하염없이 걸어야 하는 바다. 감사하게도 급행 버스를 사오십 분쯤 타면 해운대 바다에 닿을 수 있었어요. 작은 바다에 털어놓기 어려운 감정이 켜켜이 쌓인 날이면 급행 버스에 몸을 싣고 해운대로 갔습니다. 공교롭게도 당시 엄마의 직장이 해운대였던 터라, 학교가 일찍 끝난 날이면 가끔 해운대 바다에서 엄마를 기다렸습니다. 일을 마친 엄마와 바닷가에서 만나 저녁을 먹고, 급행 버스에 나란히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한 시간 거리를 돌아오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그 바다에 어떤 마음을 털어놓았는지는 어렴풋하지만, 어둠에 물든 바다를 보며 조금은 울고 이내 웃었던 기억은 선명하게 남아 있어요.


고향을 떠나 다른 도시에 살게 되면서 부산 바다와 이별했습니다. 이제 부산 바다는 마치 관광객처럼, 큰맘 먹고 계획을 세워야만 갈 수 있는 곳이 되었어요. 더 아쉬운 것은 지금 사는 도시에는 바다가 없다는 겁니다. 때문에 새로 마음을 붙이고 마음껏 울만한 바다를 만들지 못했어요. 더는 슬픔과 아픔을 실어 보내면, 후련함과 나아짐을 싣고 오던 파도를 쉽게 만날 수 없게 됐습니다. 물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대한민국이니, 마음만 먹으면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울만한 바다가 있기는 하지요. 그런데도 쉽게 찾아지지 않네요. 심리적인 거리는 물리적인 거리에 비례하나 봅니다.


그 대신으로 찾은 것이 글쓰기입니다. '쓰다 보면 보이는 것들(선량, 정아, 진아 공저)'에서 제가 '글쓰기의 바다'라는 비유적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요. 글쓰기를 바다에 비유한 것은 우연이 아닌 셈입니다. 바다를 떠나와, 바다를 그리워하는 저에게 글쓰기는 새로운 바다가 되어주었습니다. 지금 저는 글쓰기의 바다에서 울음을 털어내고 용기를 얻습니다. 절망을 비워내고 희망을 찾아요.


저를 지켜준 바다들을 떠올려봅니다. 십 대와 이십 대의 제 마음을 고스란히 받아준 바다, 제 슬픔을 덜어가고 제 울음을 싣고 간 바다. 주저앉고 싶은 마음으로 찾았다가 일어서 나아가고 싶은 마음으로 돌아온 바다. 그 바다를 닮은 지금의 바다(글쓰기의 바다)까지. 한결 같이 저를 끌어안아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밀어주는 그런 바다들을요.


여러분의 바다는, 어디인가요. 여러분의 바다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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