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나를 보고 있다(김용택)
[시쓰는 가을] 스물아홉 번째 시
꽃이 나를 보고 있다(김용택)
꽃에 물을 주며 생각한다
지금 꽃에 물을 주는 일을
성실하게 이행하자
다음에 할 일을 지금 생각하다보면
꽃에 물 주는 일을 서두르게 되고
꽃에 물주는 일이 허술하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 꽃에 물을 주며
딴생각하는 내가
나를 타이르는 것이다
꽃이 나를 보고 있으니까
출처: <모두가 첫날처럼>, 문학동네, 2023
지난 주말에 시집을 둘러보러 서점에 다녀왔습니다. 시집이 꽂힌 책장은 다른 책들에 비해 초라할 정도로 적었어요. 겨우 책장 두 칸을 차지한 시집을 떠날 수 없어 두 시간 동안 시집 코너만 서성이다 다섯 권의 시집을 데려 왔어요. 여전히 책장에 남아 있던 시집들이 눈에 밟힙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모두 데려오고 싶네요.
오늘의 시는 이번에 데리고 온 ‘김용택’ 시인의 최근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꽃이 나를 보고 있다’입니다. 김용택 시인은 제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시인인데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쉬운 어휘와 쉬운 표현으로 따뜻한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시를 무척 좋아하지만, 너무 현학적이거나 상징적인 시는 선호하지 않습니다. 제가 좋아하고, 그래서 선물처럼 배달하고 싶은 시들은 대체로 편안하게 읽히는 시예요.
‘꽃이 나를 보고 있다’ 역시 그런 시입니다. 꽃에 물을 줄 때는 꽃에 물을 주는 일만 생각하자는 것이 시 내용에 전부예요. 어휘도 표현도 어렵거나 낯선 것이 없어요. 너무도 일상적인 표현으로 ’지금(현재)에 충실하자‘라는 따뜻한 메시지를 전하지요.
저는 이 시의 가장 마지막 행이 제일 좋았어요. ‘꽃이 나를 보고 있으니까’라는 표현을 통해 시인은 꽃에 인격을 부여했습니다. 꽃은 분명히 생물이지만, 어쩐지 무생물 같은 느낌을 주는 존재인데요. 시인은 꽃의 시선을 의식합니다. 이제 꽃은 더 이상 수동적인 대상에 머무를 수 없어요. ‘나‘를 움직이게 하고, ’나‘에게 책임을 부여하는 능동적인 존재로 거듭납니다. 이 마지막 행 덕분에 일상적인 소재와 어휘가 시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이 중요하다, 현재가 가장 소중한다는 메시지는 너무 흔하지요. 지나치게 자주 듣다 보니, 무감해질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또 이 시를 [오늘의 시]로 고른 이유는, 이런 시를 읽을 때만큼은, 그 순간만큼은 나의 ‘꽃’을, 나를 움직이게 하고 나에게 책임을 부여하는 ‘꽃’을 떠올리기 때문이에요. 오늘 이 시를 함께 필사하신 분들은 대부분 가족들, 특히나 아이들을 떠올리셨는데요.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직 시시때때로 엄마 손이 필요한 두 아이를 키우며, 때론 도망치고 싶기도 하고 ’엄마‘ 부르는 소리를 외면하고 싶기도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순간에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책을 펼치며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지기도 해요. 아이들은 자랄 것이고 금세 이 마음을 후회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오늘에서 도주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입니다. ’꽃이 나를 보고 있다‘를 읽고 전하는 동안, 두 꽃의 시선을 떠올렸습니다. 여전히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좋고, 엄마와 함께 노는 것이 가장 행복한 두 꽃의 눈빛을요.
지금 아이들은 모두 새근새근 잠이 들었습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뒤척이던 둘째에게 결국에는 “제발 좀 자자, 봄아. 응?”이라며 윽박을 지르고야 말았는데요. 그 윽박 속에는 ‘얼른 아이가 잠이 들어야 일어나서 브런치에 글도 쓰고 내일 시도 고르고 아까 읽던 책도 마저 읽을 텐데’라는 생각이 가득했어요. 따뜻한 품에 아이를 안고 토닥토닥, 아이가 무사히 꿈나라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줄 마음 대신, 아이가 잠든 후 제가 하고 싶은 일들에만 온 마음을 기울이고 있었던 거죠.
종일 이 시를 생각했는데, 정작 현실은 여전합니다. 반성이나 후회를 하기에도 이젠 머쓱하네요. 내일 아침 일어나면 큰소리로 “엄마”를 부르며 품에 안겨올 아이의 눈빛을 떠올립니다. 내일은 정말이지, 아이에게 마음을 쏟아야 할 순간에 딴마음을 품지 않겠다 다짐 또 다짐해 봐요. 만약 내일 글이 발행되지 않는다면, 아이를 재우는 일을 성실히 이행하다 함께 잠들었겠거니 여겨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