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서를 쓰다(김사이)
[시쓰는 가을] 서른네 번째 시
이력서를 쓰다(김사이)
벚꽃 흐드러져 있는 이 봄밤
어릴 때 온갖 환상 속에서 부푼 둥근 저 달
사람들의 꿈을 얼마나 먹었는지 배가 터질 것 같은 달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좋을 저것은
옥탑방 아래 세상 또 누구의 꿈을 엿보고 있을까
곰곰 생각해보니
꿈을 빼앗긴 내 이력엔 무기가 없다
살면서 매 순간 바리케이드를 치고 사는 것은 아닌데
하루하루를 보이지 않는 무엇과 싸우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피 말리는 일인지
물오른 새순처럼 열정이 있다고 적을 수 없고
성실한 직장 경력으로 적금이 꽤 된다고 적을 수도 없고
사회 발전에 기여한 인사도 아니어서,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이력서를 쓴다
어느 곳에도 온전하게 속하지 못하면서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성별은 차별이 되고
갓 태어난 아기의 몸뚱이엔
주홍글씨처럼 부유와 빈곤이 나뉘어 찍힌다
자궁 속 태아에게도 계급이 있고
분노가 일기 전에 서글픔이 밀려들어
달리다 달리다 멈춰선 곳
시간은 자본으로 환산되지 않는 이력을 앞세워
40년 발길이 다시 주춤거린다
출처: <반성하다 그만둔 밤>, 실천문학, 2008
이력서 써본 적 있으신가요? 질문이 좀 잘못된 것처럼 느껴지실지도 모르겠어요. 질문을 바꾸어, “이력서를 몇 번이나 써보셨나요?”라고 여쭈어야 할까요. 감히 다행이라는 말을 써도 된다면, 다행히 저는 이력서를 요구하지 않는 직장에 다니는 덕분에 사십이 되도록 이력서를 써본 기억이 아득합니다.(대학과 대학원에 다닐 때 학원 아르바이트를 위해 이력서를 써본 게 마지막인 듯합니다.) 이런 제가 감히 ‘이력서’에 관한 시를 말해도 될까, 많이 고민했어요. 그럼에도 이 시는 많은 분들과 꼭 나누고 싶은 시라 용기 내 가져와봅니다.
‘이력서를 쓰다(김사이)’는 벚꽃이 흐드러진 봄밤, 그것도 밝고 훤한 보름달이 뜬 밤이라는 낭만적인 시간을 배경으로 한 시입니다. 하지만 화자에게 그 밤은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은 것 같아요. 어릴 적 보름달은 꿈을 소원하는 달이었지만, 어른이 된 화자는 이미 꿈을 빼앗긴 상황입니다. '꿈을 빼앗긴 내 이력엔 무기가 없다'라는 구절로 짐작건대 화자의 꿈은 이미 사장(死藏)되었고, 더는 이력이라 내세울 만한 무엇도 없는 것 같아요. 그 뒤로 이어지는 화자의 넋두리 같은 시행은, 씁쓸하다 못해 마음이 저립니다.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이력서를 쓴다'는 화자의 삶은 매일이 전쟁입니다. 누구와 싸우는지도 알 수 없으면서 매일을 피 말리는 마음으로 살아가요. 이력서에는 '열정'을 쓸 수도 없고 '성실'을 쓸 수도 없습니다. 끊임없이 이력서를 쓰는 삶에서 화자가 ‘선택할 수 있는 성별은 차별’뿐이고, 태어나는 순간, 아니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부유와 빈곤이 나뉘어' 계급이 정해지는 사회에서 화자는 ‘분노가 일기 전에 서글픔’을 느낄 따름입니다. 참, 아프고 쓸쓸한 시입니다.
이력서는 '지금까지 거쳐 온 학업, 직업, 경험 등의 내력을 쓴 문서'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까지 거쳐 온 학업, 직업, 경험 등의 내력 중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을 쓴 문서'입니다. 그래서 이력서에는 '증빙서류'가 필요합니다.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은 이력서의 항목에 쓸 수 없어요. 시에서 말한 것처럼 '열정'이나 '성실' 등의 가치는 결코 '이력'이 되지 못합니다. 열정이나 성실을 쓰고자 한다면, 그것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서류가 필요하지요. 열정을 보이려면 다양한 활동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서류를, 성실을 보이려면 한 곳의 직장 또는 기관에서 오랫동안 일한 서류나 하다못해 학창 시절 결석 한 번 하지 않았다는 출결 서류라도 보여야 합니다.
엄마가 되고, 5년간 경력이 단절되었습니다. 지금 제가 이력서를 쓴다면, 2017년 이후 이력은 공란에 가깝습니다. 복직한 지 2년이 되었으니, 그 2년간의 근무처를 이력에 포함시킬 수는 있겠네요. 하지만 그 2년간의 이력도 근무처 외에는 쓸만한 내력이 없어요. 학교나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각종 대회에도 나간 적이 없고, 퇴근 후에는 아이들을 돌보아야 하기 때문에 연수나 출장을 자유롭게 다닐 수도 없었어요. 그러니 객관적인 사실은 5년간의 휴직, 2년간의 학교 출퇴근이 지난 7년 간의 제 이력의 전부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지난 7년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 객관화할 수 없는 성실과 열정을 다해왔다고요.
아이를 낳기 전까지 저는 성과를 많이 내는 교사였습니다. 각종 대회에 출전도 많이 했고, 대표 수업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각종 연수를 찾아다니며 차곡차곡 이력을 쌓았어요. 그 이력으로 승진을 하겠다거나, 다른 일을 도모하겠다는 뜻은 맹세코 없었습니다. 다만 저를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아요. 열정이나 성실은 이력에 포함할 수 없으므로, 제 이력을 객관적 사실로 채워내고 싶었습니다.
지금 저는 객관에서 조금 멀어지는 중입니다. 보이는 것, 기록할 수 있는 것, 증명할 수 있는 것들에게서 자유로워지는 중이에요. 대신 그 에너지를 주관적 만족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한 학기의 수업을 내실 있게 구성하고, 한 시간 한 시간 수업에 최선을 다합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살피고, 아이들의 삶을 더 깊이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돈이 되지 않는 글을 매일 쓰고, 좋아하는 책을 부지런히 읽습니다. 증명할 수 없는 성실에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비단 저만 그런 건 아닐 겁니다. 비록 이력서에 쓸 수는 없다 해도, 우리 모두 저마다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오고 있지 않나요? 증명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의 지난 시간이 그저 흘러가버린 건 아니었을 거예요. 그 시간들을 스스로가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이력들을 스스로가 인정해주었으면 해요. 그 마음으로,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시간들을 믿어주고 알아주는 우리가 되었으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함께 읽으면 좋을 시
이력서(오은)
밥을 먹고 쓰는 것.
밥을 먹기 위해 쓰는 것.
한 줄씩 쓸 때마다 한숨 나는 것.
나는 잘났고
나는 둥글둥글하고
나는 예의 바르다는 사실을
최대한 은밀하게 말해야 한다 오늘 밤에는, 그리고
오늘 밤에도
내 자랑을 겸손하게 해야 한다.
혼자 추는 왈츠처럼, 시끄러운 팬터마임처럼
달콤한 혀로 속삭이듯
포장술을 스스로 익히는 시간.
다음 버전이 언제 업데이트될지는 나도 모른다.
다 쓰고 나면 어김없이 허기.
아무리 먹어도 허깨비처럼 가벼워지는데
몇 줄의 거짓말처럼
내일 아침 문서가 열린다.
문서상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다.
출처: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문학동네, 2013
*함께 읽어보면 좋은 소설
1. <일의 기쁨과 슬픔>(장류진, 창비) 중 '백한 번째 이력서와 첫 번째 출근길'
2.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최은영, 문학동네) 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매거진 [삶의 맛을 바꾸는 시 한 스푼]은 일주일에 한 번, 한 편의 시와 저의 단상을 엮어드리는 매거진입니다. 매일 글을 발행하다가 일주일 한 편 발행으로 바꾸면서 어떻게 하면 좀 더 좋은 글을 드릴까 고민했습니다. 시와 단상은 그대로 쓰되, 드리는 시와 함께 읽어볼 만한 시 또는 소설(간혹 비문학 책을 소개해드릴 수도 있습니다.)을 같이 드리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아무쪼록 시간을 내어 읽어주시는 분들께 좋은 글을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늘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일주일 무사히 보내고, 다음 주에 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