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간, 삶이 파도의 한복판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의 바람이 너무 거세어 무언가를 붙잡지 않고서는 땅을 디딜 수조차 없다는 느낌.
대단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득 찬 물병은 한 방울의 물만으로도 흘러넘치는 것처럼, 딱 그런 일이었다. 하나씩 더해지는 내외부적인 일들을 차례로 해결해나가며 마음의 물병을 비웠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하나를 덜어내기 전에 이미 다른 하나가 얹어지는 상황 속에서 일상은 쉽게 비틀거렸다.
가장 먼저 하지 못하게 된 것이 쓰기이다. 그다음은 읽기. 언젠가부터 삶을 지탱하는 두 축이라 여겼던 것들이 순식간에 물병 밖으로 넘쳐 흘러내렸다. 우선적으로 해내야 하는 다른 일들이 많았다. 나 하나와만 관련된 일이 아니라, 나 하나의 실수로 많은 사람이 불편을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었다. 그 일이 우선인 것은 당연했다.
버겁지만 물병을 비워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시간은 흐르고, 모든 일은 순리대로 흐를 테니, 천천히 하나씩 덜어내리라 마음을 다잡았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은 해야 하는 일들에 밀려 더는 ‘하고 싶다’는 욕구조차 자극하지 못했다. 체력이 바닥이니 책을 읽을 시간에 잠을 자고 싶었다. 머릿속이 복잡하니 정리되지 않은 글이 쏟아지는데, 그게 마음을 후련하게 하긴커녕 내가 이 정도밖에 안됐나 자책하게 됐다.
멍하게 할 수 있는 일들에 마음이 쏠렸다. (알고리즘의 노예가 되어 유튜브 보기, 의미없는 남의 인스타 염탐하기 등..) 마음이 캄캄하니 앞에 놓인 시간의 불마저 다 꺼져버린 느낌에 사로잡혔다. 시간의 감각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눈뜨면 아침, 눈감으면 밤인 채로 하루하루가 겨우겨우 흘러갔다. 그렇게 여름의 초입에 다다랐다.
그대 앞에 봄이 있다(김종해)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 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어느 날 나를 찾아온 마음이 아픈 아이(학생)와 우연히 시작한 시 필사. 아이의 마음을 다독이는 일은 부담스러울 수 없는 일이라, 내가 해야 하는 일 중에서도 가장 우선순위에 놓았던 일이라. 상황이 여의치 않아도, 내 마음이 지옥이라도 빼놓지 않고 꾸준히 해왔다. 그러다 그제 ‘그대 앞에 봄이 있다(김종해)’를 만났다.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이 문장을 쓰는데 후드득,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그랬다. 지금껏 ‘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 수도 없이 겪어 왔는데, 나는 또 마치 처음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종종걸음을 쳤다.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낮은 곳에 묻어두지’ 못하고, 닻을 세운 채 파도 일고 바람 부는 곳으로 무작정 나아가려 한 것이다. 그러니 젖고 쓰러지는 게 당연했다.
한참을 울고 나니 마음이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과 도움이 필요한 일을 구분해서 우선순위를 정했다. 아무리 거부해도 어차피 내가 하게 될 일은 그냥 하고 말자고 마음먹었다.
그렇다고 해서 물병 가득 채워진 물의 무게가 줄지는 않았다. 여전히 입구 근처에서 찰랑이며 위태로운 상태에 머물러 있다. 다만, 마음에 한 줄기 빛이 드리우자 쓰기와 읽기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 싹텄다. 쓰기와 읽기를 내가 해내야 할 과업처럼 물병에 함께 담은 게 문제였다. 그 둘은 내 마음의 물병이 쏟아지지 않도록, 단단히 받쳐주던 지지대였는데……. 삶에 치여 잠시 잊었던 것이다.
실로 오랜만에 노트북을 열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끝의 감각이 제법 그럴싸하다. 조용히 울리는 음악 소리와 다닥다닥 이어지는 키보드 소리가 꽤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