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은 사람 하나가 어디 산다는 말이 있다(이병률
[시쓰는 가을] 서른세 번째 시
닮은 사람 하나가 어디 산다는 말이 있다(이병률)
어서 오세요 오랜만에 오셨어요
혼자 어느 음식점에 갔다가 난데없는 인사를 받는다
나는 이 가게에 처음 온다
그냥 그러려니 넘어가는데 여행은 잘 다녀왔느냐 묻는다
아, 그냥 우연이겠지
인사와 안부 모두가 내가 속한 집합의 순간들이겠지
한 번만 더 앞뒤가 맞아버리면
여기를 뛰쳐나갈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데
늘 드시던 걸로 드릴게요, 라고 한다
나는 수굿하게 그러라고 말하나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나온 음식을 맛있게 먹는 바람에
모든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배우로 사는 것도 좋겠어
내가 나에게 좋은 배역을 주거나 하는 일
삶의 통역사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나의 나를 나에게 잘 설명해 주거나 하는 일
나는 여기에 자주 올 것이다
그리고 나를 마주치기 위해
아주 다르게 하고 오기로 한다
출처:<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문학동네 2020
11월의 첫 주말이라고 하기엔 너무 따뜻한 금요일이었어요. 쾌청한 가을 하늘이 마냥 좋다가도, 11월이 이렇게 따뜻해도 되나, 괜히 걱정스럽던 하루였습니다. 모두 무탈하셨지요?
“매일 시를 어떻게 골라요? 어떤 기준이 있어요?”
비슷한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시 배달을 시작한 지 일 년이 가까워지고 있는데요.(브런치 연재는 올여름부터였지만, 시 필사 모임 운영은 올 초부터였어요.) 일 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은 배달한 시가 최소 이백 편은 되었다는 말입니다. (주말과 휴일은 제외하더라도!) 이쯤 되다 보니, 주변에서는 시를 선정하는 기준이 있냐는 질문을 종종 해요. 시를 많이 읽는다고 하더라도, 내가 시를 좋아해서 혼자 많이 읽는 것과 누군가에게 좋은 시를 추천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니까요.
질문의 답은 늘 비슷합니다. 쉽게 읽히는 시,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수월하게 와닿는 시, 보편적으로 공감할 만한 시가 우선이에요. 시 전공자가 아닌 분들도 쉽게 시의 장벽을 넘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분들이 시를 매력적인 문학 갈래로 느끼게 하는 일에 (누구도 부여하지 않은) 책임감을 느껴요. 그렇다 보니 읽기 쉬운 시, 공감할 만한 시를 고르는 것이 첫 번째 조건이 될 수밖에 없어요. 두 번째 조건은 일상적으로 생각하기 어렵지만, 한 번은 꼭 생각해 볼 만한 거리를 가진 시를 선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자아)‘에 관한 시를 자주 고르게 됩니다. 오늘의 시도 이런 조건 하에 골라 본 시입니다.
‘닮은 사람 하나가 어디 산다는 말이 있다(이병률)‘는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할 만한 일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쉽게 읽히는 시입니다.) 화자는 우연히 들른 음식점에서 다른 사람(닮은 사람)으로 오해를 받아요. 처음에는 그 일이 썩 유쾌하지 않습니다. ‘한 번만 더 앞뒤가 맞아버리면/여기를 뛰쳐나갈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어요. 주인이 음식을 내오고, 화자는 생각과 달리 음식을 무척 맛있게 먹습니다. 이후 이어지는 내용이 이 시를 배달하기로 결심한 결정적 이유였어요.
배우로 사는 것도 좋겠어
내가 나에게 좋은 배역을 주거나 하는 일
삶의 통역사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나의 나를 나에게 잘 설명해주거나 하는 일
바로 이 부분입니다. ‘내가 나에게 좋은 배역을 주는 일, 나의 나를 나에게 잘 설명해 주는 일‘이라는 표현이 무척 매력적이었어요.(생각할 거리가 있었습니다.) 이 부분이 저에게는 타인의 시선이나 인정보다, ‘나’의 선택으로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일, 내가 ’나‘ 자신과 가장 친한 친구가 되는 일로 읽혔어요.
저는 상황에 많이 휘둘리는 사람입니다. 늘 씩씩하고 밝은 사람이고 싶지만, 상황이나 조건 변화에 무척 민감한 편이에요. 좋은 사람들과 좋은 환경에서 일하게 될 때면 저 역시 좋은 사람이 되지만, 반대의 상황이 되면 날 서고 냉정한 사람이 되기 일쑤입니다. 어쨌든 해야 할 일이 있고 보내야 할 시간이 있다면, 내가 나에게 좋은 배역을 줄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요.
불현듯 ‘죽음의 수용소에서(빅터 프랭클)‘라는 책이 떠오릅니다. 죽음의 수용소라 불리는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던 저자가 그 경험을 통해 깨달은 바, 인간이 마지막까지 지킬 수 있는 자유는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라고 했지요. 결국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에게 좋은 배역을 줄지, 나쁜 배역을 줄지는 오직 ‘나’의 선택인 셈입니다.
시를 읽고, 글을 쓰면서 어쩐지 삶이 조금씩 더 어려워지는 느낌입니다. 그래도 이 느낌이 싫지 않은 것은, 어려운 길로 나아가는 걸음이 잘못된 길은 아닐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에요.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좋은 배역’으로 잘 살아내었나 돌아보는 밤입니다. 마냥 편안한 밤은 아니네요.^^;; ‘나의 나를 나에게 잘 설명해 주는 ‘ 밤을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든! 모두 한 주 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다음 한 주도 스스로에게 좋은 배역을 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먹으려면, 주말은 푹 잘 쉬셔야 합니다. 저도 잘 쉬겠습니다. 다음 주에 또 뵙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삶의 맛을 바꾸는 시 한 스푼]은 매일 한 편의 시와 저의 단상을 함께 드리는 매거진이었습니다. ‘응원하기’ 기능이 탑재된 브런치북 연재 기회가 생겼지만, 이 매거진은 응원하기와 무관하게 계속 써나갈 계획입니다. 다만, 다음 주부터는 매일 발행 대신 주 1회(금요일 또는 토요일 예정) 발행을 하려고 합니다. 매일 발행을 하다 보니, 비슷한 소재로 비슷한 경험을 쓰는 일이 생기기도 하고 무엇보다 글의 질이 떨어지지 않나 하는 우려가 생겼습니다. 또 시와 관련된 이야기 외에, 제가 원래 쓰고 있던 학교나 수업, 육아 이야기를 쓰기가 어려워졌다는 아쉬움이 생기기도 했고요.(이 부분이 제일 큰 이유입니다.) 매일 발행에서 주 1회 발행으로 바꾸는 만큼, 더 깊이 고민하고 더 좋은 표현을 골라, 더 나은 글을 드리고자 노력하겠습니다. 늘 읽어주시는 독자님들, 언제나 진심으로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