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의 생(정재학)
[시쓰는 가을] 서른두 번째 시
글자의 생(정재학)
아빠, 숨쉬는 글자를 알려줘! 이제 막 한글에 흥미가 생긴 아들이 묻는다. 모든 글자는 숨을 쉬고 있단다. ㄱㄴㄷㄹ도 ㅏㅑㅓㅕ도 다른 글자들을 만나기 위해 항상 숨을 쉬고 모든 글자들은 절대 죽지 않아. 영원히? 글자의 힘에 의지하는 것들만 그 글자 속에 숨어서 영원히 살 수 있어. 글자는 말이 되기도 하고 숨이 되기도 하고 말은 글자가 되기도 하고 노래가 되기도 한단다. 심장박동을 크게 만드는 멋진 말들은 시가 되지! 아빠가 시인인 건 아는데 시가 뭐야? 시는 우리를 꿈꾸게 하는 글자들이야. 시 속의 글자들은 우리를 새로운 곳으로 글자 수보다 훨씬 긴 여행을 하게 해주지. 많은 사람들 많은 사물들을 만날 수 있고 많은 놀이를 할 수 있단다. 엄청 멋진 거지! 달팽이 속에도 글자가 숨어 있고 매미 날개에도 글자가 숨어 있고 기차 소리에도 글자가 숨어 있고 미끄럼틀 속에도 글자가 숨어 있단다. 시인은 그걸 찾아내는 거야. 그걸 어떻게 알고 찾아? 그것들을 좋아하고 마음으로 상상하면 진짜로 들린단다. 만화의 주인공은 누구나 하나만 떠올리지만 시는 읽는 사람마다 다른 모습을 떠올리지. 그리고 그 모습이 꿈틀꿈틀 움직이지. 글자들이 숨을 쉬기 때문이야. 진짜야? 글자들은 정말 멋진 뱀과 지렁이들이구나!
출처:<아빠가 시인인 건 아는데 시가 뭐야?>, 문학동네, 2022
<아빠가 시인인 건 아는데 시가 뭐야?>라는 제목이 너무 매력적이라 담긴 시를 살펴보지도 않고 집에 데려온 시집입니다. 아이들과의 대화를 기록하는 습관이 있는 제게, 아이의 질문을 제목으로 삼은 시집을 외면할 도리는 없었지요. 집에 와서 시집을 찬찬히 읽어보다가, ‘글자의 생’에서 마음이 멈추고 말았어요. 요즘 첫째 아이와 한글 공부 중이라 더 그랬을 거예요. ㄱㄴㄷㄹ ㅏㅑㅓㅕ를 읽고 쓰는 아이의 손끝에서, 홀로 있을 땐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자음과 모음이 만나 의미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지켜봅니다. 그 마음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사실 제 마음은 글자에 대한 경이라기보다는 무지에서 앎으로 나아가는 아이에 대한 경이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해서 글자가 생명력을 얻는 과정 자체도 신비롭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심장박동을 크게 만드는 멋진 말들은’ 시가 된다고 합니다. 시가 뭐냐는 아이의 질문에 ‘시는 우리를 꿈꾸게 하는 글자들이’라고 답합니다. 시인은 여기저기 숨어있는 글자를 찾아내는 사람이라고 해요. 시는 ‘읽는 사람마다 다른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데 그 이유는 ‘글자들이 숨을 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시인인 아빠의 말을 듣고 있던 아들의 마지막 말, “진짜야? 글자들은 정말 멋진 뱀과 지렁이들이구나!”는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습니다.
제가 시를 좋아하는 이유를 모두 설명해 준 시였어요. 주변의 흔하디 흔한 사물 속에 숨어 있는 글자들을 고운 마음으로 찾아내는 시인들. 덕분에 시에서 생명력을 얻는 글자들. 그 글자를 타고 처음 느끼는 감정으로 감각으로 떠나는 여행. 같은 시를 읽고도 다른 감정과 감각을 느끼는 일의 신비로움. 놀랍도록 깊이 공감하며 이 시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시를 기반으로 하는 책(곧 출간 예정입니다.^^)을 집필하고 [시쓰는 계절]을 운영하면서, 정말 많은 시들을 만났습니다. 어떤 시는 종일 마음을 먹먹하게 했고, 어떤 시는 주체할 수 없이 들뜨게 했어요. 어떤 시는 울게 했고, 어떤 시는 웃게 했습니다. 어떤 시는 나아가게 했고 어떤 시는 멈추게 했고요. 그 많은 시들에 쓰인 글자들은 분명, 자음과 모음의 단순 조합이 아니었어요. 일상에서 만나는 소재를 명명하는 글자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저마다의 생을 갖고 새롭게 태어난, 생명력 있는 존재였습니다.
매일 시를 고르고, 글을 쓰는 일이 버겁지 않다면 거짓말입니다. 그럼에도 이 일을 멈추지 못하는 것은 시를 통해 ’글자의 생‘을 만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국어사전 속에 머무는 죽은 글자가 아니라, 시 안에서 꿈틀꿈틀 살아 숨 쉬는 ‘살아있는 글자’를 마주하는 일은 너무도 매력적이거든요.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어려울 만큼이요!
내일은 또 어떤 글자를 품은 시를 만나게 될까요. 새로운 만남을 준비하는 마음은, 오늘도 설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