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락된 과식(나희덕)
[시쓰는 가을] 서른한 번째 시
허락된 과식(나희덕)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햇빛이 가득한 건
근래 보기 드문 일
오랜 허기를 채우려고
맨발 몇이
봄날 오후 산자락에 누워 있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햇빛을
연초록 잎들이 그렇게 하듯이
핥아먹고 빨아먹고 꼭꼭 씹어도 먹고
허천난 듯 먹고 마셔댔지만
그래도 남아도는 열두 광주리의 햇빛!
출처:<어두워진다는 것>, 창비시선, 2001
11월의 첫날인데 날씨는 여전히 가을입니다. 근래 몇 년을 떠올려 봐도 이렇게 오래 가을을 누려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하늘은 높푸르고 공기는 맑고 깨끗하며 온도는 덥지도 춥지도 않은 딱! 교과서적인 가을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와, 하늘 좀 봐요.”
“날씨 너무 좋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동료들과 짧은 산책을 할 때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감탄을 터트리는데요. 정말이지, 이렇게 가을 햇살을 오래도록 누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올 한 해의 복은 다 받지 않았나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허락된 과식(나희덕)’에서는 봄날의 햇살을 마음껏 누리는 화자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봄의 연초록 잎들이 햇빛을 먹듯, ‘핥아먹고 빨아먹고 꼭꼭 씹어도 먹고/허천난 듯 먹고 마셔댔지만’ 여전히 봄햇살은 차고 넘쳐요. 아, 봄날의 진한 햇살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시입니다.
이 시는 어느 봄날, 선물처럼 드리려고 꼭꼭 숨겨두었던 시였어요. 그런데 최근에 봄 햇살보다 좋은 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이어져서 도저히 혼자만 알고 있을 수가 없더라고요. 시와 달리 지금은 가을이지만, 누구나 공감할 만한 시가 아닐까 합니다.^^
이 가을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과식이 허락된 순간까지는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핥아먹고 빨아먹고 꼭꼭 씹어도 먹-’어 봅시다! 춥고 시린 겨울이 와도, 지금의 햇살을 충분히 먹고 마셔둔다면 조금은 덜 춥고 덜 시린 날들을 보내게 될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