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가 담을 넘을 때(정끝별)
[시쓰는 가을] 서른여섯 번째 시
가지가 담을 넘을 때(정끝별)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 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 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출처:<삼천갑자복사빛>, 민음사, 2005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습니다. 하루아침에 한 계절이 훌쩍 지나버린 것 같은 하루였어요. 지난 한 주간 별일 없으셨나요? 저는 좀 바빴지만 대체로 즐거웠고, 가끔 눈물 났지만 가끔 방방 뛰며 웃기도 했던. 꽤 근사한 한 주를 보냈습니다. 한 해를 보낼 준비에 분주한 지금, 한 주를 돌아보는 마음에 근사함이 피어나다니. 정말 근사하네요. 그만큼 감사하고요.
얼마 전 수업시간에 <스노우맨>(서유미)이라는 단편소설을 다루었습니다. 간단히 줄거리를 소개해드리면, 주인공 ‘남자(이 소설에는 등장인물의 이름이 없습니다. 익명성에 가려져 있어요.)’는 새해 첫날과 이튿날을 연휴로 보내고 시무식이 열리는 1월 3일, 새해 첫 출근을 준비합니다. 양복을 차려입고 현관을 나서지만 연휴 내내 내린 폭설로 막혀버린 빌라 입구를 발견합니다. 허리쯤까지 쌓인 눈 때문에 문이 열리지 않아요. 이번에도 승진에서 밀리면 큰일이라 생각했던 남자는 초조해집니다. 어떻게든 출근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문이 꼼짝을 하지 않거든요. 다행히 회사에서 연락이 오고, 모두 눈 때문에 출근을 할 수 없으니 따로 연락이 갈 때까지 기다리라고 합니다. 남자는 연휴가 연장된 듯한 기분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 소파에 누워버립니다. 그런 남자를 아내는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봐요.
남자는 그다음 날도 출근을 하지 못합니다. 1월 5일. 이제 그만 출근을 했으면 하는 아내의 눈치에 못 이겨 남자는 집을 나서고, 빌라의 입구가 조금 열려 있는 것을 봅니다. 그때부터 남자는 스스로 눈을 파면서 출근을 합니다. 길에는 사람은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도 없어요. 눈을 파다 파다 지친 남자가 출근을 포기할까 생각하던 찰나, 회사에서 전화가 걸려옵니다. 회사 사업부 전체에서 남자를 포함하여 딱 두 명만 빼고 모두 출근을 마쳤다고 해요. 그때부터 남자는 마음이 급해집니다. 혼자 눈길을 파고 또 파는 동안 양복은 눈에 흠뻑 젖어버립니다. 손의 감각도 사라져 가요.
이 소설은 그 뒤로 이야기가 진짜 흥미로워서 줄거리 소개를 이쯤에서 마칩니다.(꼭 읽어보시길!) 시의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엉뚱하게 소설 이야기를 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드릴 시 ’가지가 담을 넘을 때(정끝별)‘을 읽으며 ’스노우맨‘의 ‘남자’가 계속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 이야기를 해볼게요. ‘가지가 담을 넘을 때’에서는 가지가 담을 넘을 때 필요한 요건들을 이야기합니다. 먼저 ‘얼굴 한 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혼자인 듯 보이는 가지는 뿌리와 꽃, 잎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가지와는 줄기로 이어져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뿌리지만, 잠시 잠깐 가지 끝에 매달렸다 떨어진 꽃과 잎이지만, 이들의 믿음이 아니었다면 가지는 감히 담을 넘어설 생각조차 못했을 겁니다. 이들이 주는 ‘혼연일체‘의 믿음이 있었기에 가지는 저 높은 담을 넘어서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어요.
믿음뿐만 아닙니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와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도 가지가 담을 넘는 일에 한 몫합니다. 비와 폭설은 분명 가지가 담을 넘는 일에 장애물입니다. 하지만 그런 정도의 시련도 없었다면, 가지는 ‘신명나’게 담을 넘지 못했을 거예요. 시련과 장애를 극복하고 목표한 바를 이루는 것, 성취를 얻는 것만큼 신명 나는 일은 없습니다. 여기서 끝났다면 시의 감동이 조금 덜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다음이 저에게는 충격적일 만큼 좋았습니다.
‘담 밖을 가둬 두는/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가지가 담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담밖의 세계에 관한 궁금증은 결국 ‘담’이 밖의 세계를 가려두었기 때문이에요. 그 너머의 세계에 궁금증이 일지 않았다면, 가지는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을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모든 가지가 담을 넘어갈 때에 바로 그 ’담‘은 도박 같은 일이자, 도반(함께 도를 닦는 벗) 같은 대상이었을 겁니다. 즉, ‘담’은 가지에게 그 자체로 도박처럼 위험하지만 흥미로운 일이기도 하고, 가지의 도전을 가능하게 하는 벗이기도 한 셈입니다.
담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한다면, ‘담’은 목적지 혹은 새로운 세계(미지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넘어야 하는 한계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혹은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딛기 위해서는 저마다의 한계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 한계가 줄넘기 넘듯 훌쩍 넘어버릴 수 있는 것이라면 좋겠지만, 우리가 사는 동안 맞닥뜨리는 한계 상황은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높이도 가늠할 수 없고, 그래서 끝도 알 수 없는 아득한 담일 때가 많아요.
아무리 담이 높아도 무한한 시간이 주어지고, 별다른 장애가 없다면 수월하겠지요. 그러나 생이 어디 그리 만만한가요. 해 뜨는 날이 하루 이틀이면 비 오는 날은 닷새쯤입니다. 녹을 새도 없이 폭설이 쌓이기도 하지요. 시련을 만날 때마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도 그 순간을, 그 고비를 잘 넘기고 나서 담 아래를 내려다보면 신명이 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비를 이겨냈다는 마음, 폭설을 뚫고 나아갔다는 마음이 다음 걸음을 내딛는 동력이 됩니다.
그런 일들이 모두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뿌리’ 같은 이들, ‘꽃과 잎‘ 같은 이들입니다. 혼연일체로 우리를 믿어주는 그들이 있어서 모든 일은 가능한 일이 됩니다. 어떤 담을 선택하든, 어떤 길로 나아가든 우리를 믿어주고 지지해 주는 이들이 있다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넘어갈 수 있어요.
다시 <스노우맨>으로 돌아가봅니다. ’남자‘는 눈길을 뚫고 출근을 하는 동안,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절실하게 합니다. 출근을 하지 않는다며 눈치를 주던 ’아내‘와 출근을 빌미로 압박하기 바쁜 ‘과장, 부장‘의 전화는 받지 않지만, 그 어느 때보다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남자‘는 회사라는 목적지를 향해 ’폭설’이라는 담을 넘고자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남자’에게는 ‘뿌리, 꽃, 잎’처럼 혼연일체로 자신을 믿어주는 이가 없어요.(적어도 소설 속 장면에서는요.) 폭설을 뚫고 도달하려는 회사라는 세계도 어떠한 호기심이 닿지 않는 곳이고요.(새롭기는커녕 별 볼일 없는 곳이지요.) ‘남자’에게 폭설은 결코 도반이 될 수 없고, 그러니 폭설을 넘는 일이 도박이 되기도 어렵습니다.
소설 속 ’남자‘에게 믿음을 준 단 한 사람이 있었다면 ’남자‘는 무사히 폭설을 뚫고 출근에 성공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남자‘의 회사가 새로운 꿈이자 가능성의 세계였다면 끝까지 나아갔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여기서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를 남겨드립니다. 여러분에게는 ’뿌리‘가, ’꽃과 잎‘이 있으신가요? ’비‘도 ’폭설‘도 이겨내 볼만한 장애라 여길 만큼, 너머의 세계가 궁금한 ’담‘이 있으신가요?
*덧붙여.
이 시는 올해(2024학년도) 수능에 기출 된 시입니다. 열아홉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이었을 ‘수능’에서 이 시를 맞닥뜨린 수험생들은 이 시를 읽으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수능이라는 담을 넘기 위해 견뎌온 수많은 시련의 순간들이 떠올랐을까요. 그 담을 함께 넘어준 가족들과 친구들의 마음이 떠올랐을까요. 이 담을 넘고 나면 열린, 새로운 세계에 두근거렸을까요. 문제를 푸는 동안에는 그런 생각을 할 여유 따위 없었겠지요. 이렇게 좋은 시를,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는 시를 수능에서만 만났을 아이들이 조금 안타깝습니다만, 살아가다 어느 순간 이 시를 다시 만났을 때, 반가운 마음이 든다면 그 또한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함께 읽으면 좋을 시
담쟁이(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출처:<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 함께 읽으면 좋을 소설
1. 서울 1964년 겨울(김승옥)
2. 스노우맨(서유미)
* 매거진 [삶의 맛을 바꾸는 시 한 스푼]은 일주일에 한 번, 한 편의 시와 저의 단상을 엮어드리는 매거진입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시와 책도 소개해드려요. 이 매거진은 매주 주말에 발행합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