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는 마음(오은)
[시쓰는 가을] 서른일곱 번째 시
밑줄 긋는 마음(오은)
노트를 사면 가장 먼저 하는 일
이름을 적는 일
학교와 학년과 반과 번호는 그다음
시험에 나올 만한 것들을 적고
외우기 힘든 공식 옆에는 별표도 달아 둔다
rain과 rein처럼 헷갈리는 영단어를 나란히 쓴다
비와 고삐는 너무 멀다
모래와 모레가 서로를 모르는 것처럼
모래에 다가가는 상상
모레가 다가오는 상상
코가 간질간질하더니
기다렸다는 듯 재채기가 나온다
내 이름 밑에 밑줄 두 개를 긋는다
빗줄기처럼 한 번, 고삐처럼 또 한 번
나는 그 누구와도 대체될 수 없으니까
모래와 모레처럼
닮은 듯 보여도 전혀 다른 존재이니까
그런 이름들이
교실 안에 줄지어 있다
각자의 노트를 안고
각자의 펜을 들고
밑줄 그을 순간을 기다리는 손끝
출처: <마음의 일>, 창비, 2023
지난 목요일, [시쓰는 가을]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시쓰는 가을]에서는 오십 편이 조금 넘는 시를 멤버분들과 함께 필사했는데요. (브런치에 소개한 시는 그중에서 서른여섯 편이었네요.) 오십여 편의 시를 맺는 마지막 시로 어떤 시를 골라볼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왠지 ‘처음‘과 ’마지막‘은 조금 더 특별한 마음이 드니까요. 처음은 설렘이 깃든 특별함이라면, 마지막은 애틋함이 깃든 특별함이랄까요.
오랜 고민 끝에 [시쓰는 가을] 멤버분들과 마지막으로 필사할 시로 ’밑줄 긋는 마음(오은)‘을 골랐습니다. 마지막 필사 페이지에 밑줄 긋는 마음 한 자락을 남기면, 어쩐지 우리가 꼭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았거든요.
이 시는 본문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기도 전에, 제목에서 이미 마음을 내어준 시입니다. 저는 책을 읽을 때 밑줄을 열심히 긋습니다. (그래서 중고거래도 하지 못한 책들이 책장에 쌓여갑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누군가가 그어둔 밑줄을 보면 괜히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마음이 잠시 머물렀던 흔적 같아서 가만히 밑줄에 손을 대보기도 해요. (아! 그렇다 하더라도 저는 도서관 책에 밑줄을 긋지 않습니다!)
며칠 전에도 열심히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고 있는데, 첫째 아이가 다가오더니 대뜸 물었습니다.
”엄마, 왜 책에 낙서해?“
“아, 이건 낙서가 아니라 밑줄이라고 하는 거야. 글 밑에 줄을 긋는 거라서.”
“왜 줄을 긋는데?”
“음. 엄마 생각에는 이 부분이 중요한 것 같아서. 기억하려고!”
”그럼 여기도 중요해서 줄 그은 거야?“
“아, 이 부분은 중요하다기보다는….”
“중요한 것 같아서 밑줄 긋는다며~”
“아, 그런데 이 부분은 중요하다기보다는 엄마 마음에 남아서 그은 거야. 이 문장이 너무 아름다워서.”
아이와 대화를 하면서 밑줄 긋는 마음을 생각했습니다. 어떤 문장은 너무 중요해서, 어떤 문장은 너무 아름다워서 밑줄을 긋는 마음을요. 이 문장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잊고 싶지 않아서 밑줄을 그어 손끝에, 마음 끝에 매달아 두는 마음을요.
’밑줄 긋는 마음(오은)‘에서 밑줄 그어지는 문장(사실 문장이 아니지만)은 ‘내 이름’입니다. ‘그 누구와도 대체될 수 없-’는 ‘내 이름’ 아래 밑줄을 그어요. 참 아름다운 시입니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며 ‘나는 그 누구와도 대체될 수 없으니까’라는 시행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힘주어 쫙쫙. 두 줄을 그었어요.
시의 표현대로 ‘교실 안에는 그런 이름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서른 명에 가까운 ‘대체될 수 없는 나’가 있어요. 너무나 중요하고, 너무나 아름다운 이름들이 있습니다. 저는 매일 그 이름들을 만납니다. 저마다의 가치와 빛깔을 지닌 ‘대체될 수 없는 이름’들입니다. 이 아이들이 저마다의 빛깔과 모양을 찾아가도록 돕는 곳이 학교라고 믿고 있습니다. 아니, 믿고 싶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제 믿음이 아직은 ‘소망’에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학교가 모두에게 그런 곳이라면 좋겠지만, 지금의 학교는 그렇지 못한 모습도 많이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일반계 고등학교는 모든 학사일정이 입시를 향해 달립니다. 그 트랙에서 벗어나려는 아이들이 제 이름을 세울 곳은 마땅치 않아요. 다양성과 개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교육이 바뀌고 있다고 하지만, 입시 앞에서는 여전히 속수무책으로 획일화되고 맙니다.
때문인지, 아이들은 자기들이 너무나 중요하고 너무나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밑줄 그어 표시해야 할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요. ‘대체될 수 없는 나‘라는 믿음은커녕, 내신등급의 숫자로 쉽게 ‘대체되는 나’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라고 하기도 어렵지요. 실제로 아이들의 내신등급을 나타내는 숫자는 무척 중요하게 여겨지지만,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이름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여겨지니까요.
이 시를 마지막 시로 고르면서, 함께 해주시는 멤버분들은 자신의 이름 석자에 자신 있게 밑줄을 그어보셨으면 했습니다. ‘나는 그 누구와도 대체될 수 없으니까!’ 외치는 마음으로, 자기 이름 아래에 밑줄 두 줄을 그어보셨으면 했어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나를 나타내는 숫자가 대단치 않아도, 내가 나를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내가 나를 아름답게 여기는 마음으로. 밑줄을 쫙!
그 마음이면 충분할 것 같아요. 내가 나를 알아차리는 마음이면요. 지금 제가 만나는 아이들이 아직 그 마음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도, 머지않은 어느 날 그 마음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날이 조금이라도 당겨질 수 있도록, 대체될 수 없는 아이들의 이름을 더 많이 불러주어야겠습니다. 아이들의 이름에 밑줄 긋는 마음으로 힘주어, 더 자주 불러주어야겠어요.
* 오늘 함께 읽으면 좋을 시와 책은 ‘학교’를 테마로 골라보았습니다. 아무래도 글을 쓰면서 학교 아이들 생각을 많이 하게 되네요.
* 함께 읽으면 좋은 시
오 씨앗들(정현종)
-한 중고등학교 개교기념일에 부쳐
‘발랄’이 별명인
십 대
소년소녀.
그들은 말하자면
움직이는 무한이에요.
잠재력 무한
호기심 무한
창의력 무한
열중 무한
꿈 무한……
학교는 말하자면
그 무한한 것들이
맘껏 피어나고
잘 흐르고
잘 익어가게 하는 공간,
매장량을 알 수 없는
그 애들의 자발성이
빛을 발하도록
부추기는 곳
보살피는 곳.
하여간
그 애들 속에 들어 있는
(투명해서 다 보이는)
씨앗들을
한없이 소중하게
보듬는
품.
씨앗들
숨 쉬는 소리
들려요.
출처:<광휘의 속삭임>, 문학과지성사, 2008
*함께 읽으면 좋은 소설
꼬리와 파도(강석희)
*매거진 [삶의 맛을 바꾸는 시 한 스푼]은 일주일에 한 번, 한 편의 시와 저의 단상을 엮어드리는 매거진입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시와 책도 소개해드려요. 이 매거진은 매주 주말에 발행합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