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오은)
[시쓰는 겨울] 첫 번째 시
그것(오은)
온다 간다 말없이 와서
오도 가도 못하게 발목을 붙드는,
손을 뻗으니 온데간데없는
출처:<없음의 대명사>, 문학과지성사, 2023
이번주 화요일부터 시쓰는 겨울이 시작되었습니다.(시쓰는계절은 제가 인스타그램에서 운영하고 있는 시 필사 모임의 이름입니다.) 봄에 시작한 모임이 겨울까지 벌써 네 번째 시즌을 맞이했어요. 이번 시즌에는 열다섯 분의 멤버들이 함께 필사를 하고 단상을 나눕니다. 시즌이 거듭될수록 참여 인원이 늘어나는 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네 계절을 모두 함께 해주신 분들도 꽤 있으니, 시를 나누는 일에 보람이 더해집니다.
시 쓰는 겨울의 첫 번째 시로 배달한 시는 ‘그것(오은)’입니다. 이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 시가 수록되어 있는 <없음의 대명사>라는 시집을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없음의 대명사>는 굉장히 독특한 시집입니다. 수록된 시의 제목이 모두 대명사예요. 그곳, 그것, 그것들, 그것, 이것, 그들, 그, 우리, 너 등이 시의 제목들입니다. 심지어 같은 대명사 제목 아래에 쓰인 시가 여러 편이기도 합니다. ‘그곳’ 3편, ‘그것들’ 6편…. ‘그것’은 열 편이 넘습니다.
대명사는 앞서 언급된 명사를 ‘대신하는 말’입니다. ‘민호가 서점에서 책을 본다. 그는 그곳이 익숙한 듯 자연스럽다.‘ 라는 문장에서 ’그, 그곳’은 앞 문장에 쓰인 ‘민호, 서점’이라는 명사를 대신하는 말입니다. 즉 ‘민호, 서점‘이라는 명사가 없으면 ‘그, 그곳‘이라는 대명사의 의미는 매우 불분명해집니다. 달리 말해, 앞 문장 없이 ’그는 그곳이 익숙한 듯 자연스럽다‘라는 문장만 있다면, 읽는 사람에 따라 모두 다른 사람, 다른 장소를 떠올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없음의 대명사>에 수록된 시의 제목이 모두 대명사라는 것은 읽는 사람에 따라 모든 시가 다르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시라는 갈래 자체가 원래 해석의 여지가 많고, 독자의 상황에 따라 다른 정서를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의 제목마저 ‘대명사’로 지칭 대상이 불분명할 경우에는 차원이 다른 모호함이 생깁니다. 이 모호함이 <없음의 대명사>라는 시집을 읽는 묘미입니다.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물론이거니와, 같은 사람이 읽더라도 시시각각 다른 이미지와 정서들이 유발됩니다. 참 흥미로운 시집입니다.
시로 돌아가보겠습니다. ‘그것(오은)’은 이 시집에서 가장 짧은 시입니다. 이 짧은 시를 읽고 또 읽으며, ‘그것’의 자리에 얼마나 많은 단어를 넣어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번뜩 떠오른 ‘그것’은 사랑이나 그리움 같은 감정이었습니다. 사랑이나 그리움은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일상을 덮칩니다. 사랑이나 그리움은 ‘지금부터 누구를 사랑해야지!’ 혹은 ‘누구를 그리워해야지!’라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정말 ‘온다 간다 말없이 와서/오도 가도 못하게 발목을 붙드는’ 감정입니다. 그러면서 ‘손을 뻗으-’면 ‘온데간데없-’이 아스라이 사라져 버리는 감정이기도 하고요.
두 번째로 떠오른 것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잔상이었습니다. 아주 가끔 할아버지 꿈을 꾸는데요. 특별히 할아버지 생각을 하고 잠든 것도 아닌데, 갑자기 꿈에 나타나셔서 꼭 살아계시던 모습 그대로 고향집 방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시거나 바둑을 두십니다. 생전에도 무뚝뚝한 분이셔서 한 번도 손을 잡아주시거나 안아주신 적이 없습니다. 꿈에서도 마찬가지세요. 할아버지 쪽으로 손을 뻗을라 치면, 꿈은 깨고 맙니다.
할아버지의 잔상이 지워지기도 전에 또다시 떠오른 것은 시간입니다. 그중에서도 ’오늘‘이라는 현재진행형의 시간이에요. 아이를 재우다 함께 잠들어 버린 밤, 눈을 뜨면 분명히 좀 전까지는 내일이었을 시간이 ‘오늘’로 닥쳐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내 마음대로 오늘에서 나아갈 수도, 뒷걸음질 칠 수도 없습니다. 부정할 수도, 거부할 수 없이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다 ‘오늘’을 인식하려 하면 이미 ‘오늘’은 어제가 되어버린 후입니다.
‘그것’이라는 대명사 하나로 이토록 여러 가지 생각을 불러일으키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시의 매력에 빠진 지 오래지만, 이런 시를 만날 때면 ‘앞으로 영영 시의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없겠구나’ 단념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 시를 읽는 동안 어떤 ’그것‘을 떠올리셨나요. ’손을 뻗으니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이라는 마지막 시행이 어쩐지 애틋해서 많은 분들이 이미 사라진 것들, 이미 떠난 것들을 많이 떠올리셨을 것 같아요. 사라지고 떠난 것들이 반드시 슬프고 아픈 것은 아닐 테니, 덜 슬프고 더 기꺼운 ’그것‘을 떠올리셨다면 좋겠습니다.
*함께 읽으면 좋을 시/책
오늘 ‘함께 읽으면 좋을 시와 책’ 소개는 본문에 소개해드린 <없음의 대명사>라는 시집으로 대신합니다. 꼭 읽어보시기를! 대명사의 매력과 시의 매력에 동시에 빠지실 거라고 감히 장담합니다.^^
*매거진 [삶의 맛을 바꾸는 시 한 스푼]은 일주일에 한 번, 한 편의 시와 저의 단상을 엮어드리는 매거진입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시와 책도 소개해드려요. 이 매거진은 매주 주말에 발행합니다. (지난 주말에는 코로나를 앓느라 발행하지 못해 이번 주만 뒤늦은 발행을 합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