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눈발이라면(안도현)
[시쓰는 겨울] 두 번째 시
우리가 눈발이라면(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다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살이 되자
출처:<안도현시선>,아시아,2017
눈이 많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남쪽이라, 눈은 오지 않았어요. 대신 엄청난 칼바람이 종일 불었습니다. 이중창을 꼭꼭 닫고 커튼까지 쳤는데도 바람 이는 소리가 너무나 생생해서 몇 번이나 창문의 여밈을 확인했던 날이었습니다. 눈 구경이 어려운 지역에 살다 보니, ‘이런 날 여기도 눈이나 실컷 왔으면!’ 생각했다가 금세 생각을 접었어요. 눈이 주는 낭만보다, 눈 온 이후의 일상을 걱정할 만큼 나이를 먹어버렸나 봅니다.
주말 동안 클레이키건의 신작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었습니다. 전작인 ‘맡겨진 소녀’와 마찬가지로 단편이라기에는 조금 길지만 단행본 한 권 분량이라기엔 짧은 소설이었어요. ‘맡겨진 소녀’도 단단하고 분명한 서술이 무척 인상 깊었던 터라 기대가 컸습니다. 엎드려서 읽기 시작했는데 소설에 빠져들수록 점점 몸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다 읽고는 쉬이 책을 덮을 수 없어,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고야 말았어요. ‘맡겨진 소녀’ 때도 그랬는데, 클레이 키건의 소설은 마지막 장에서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가게 하는 힘이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18세기부터 20세기말까지 아일랜드 정부의 협조하에 가톨릭 수녀원이 운영하며 불법적인 잔혹 행위를 저질렀던 ‘막달레나 세탁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펄롱‘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그 세탁소에 감금된 소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느냐 마느냐의 기로에서 번민하는 모습을 다룹니다. (상세한 내용은 소설에 대한 스포가 될 수 있기에 생략합니다. 꼭 읽어보시길!)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소설 이야기부터 하는 이유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가 눈발이라면(안도현)’이 계속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소설도 시도 겨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눈이라는 소재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더 자연스럽게 떠올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더 본질적으로 접근해 보자면 ‘펄롱‘의 모습이 마치 진눈깨비에서 따뜻한 함박눈으로 나아가는 모습처럼 보였기 때문이에요.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쭈볏쭈볏 흩날리다 사라져 버리는 진눈깨비가 아닌,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끝내 ’사람이 사는 마을/가장 낮은 곳으로‘ 펑펑 쏟아지는 ’따뜻한 함박눈‘같았거든요. 소설을 덮으며, 결국 그의 선택이 누군가에게는 ‘편지’가 되고 ’새살’이 되었을 거란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나 하나 잘 살기도 힘든 세상입니다. 팍팍하다는 단어로는 다 설명할 수도 없을 만큼 어려운 세상이에요. 나보다 더 추운 사람들에게, 내가 선 자리보다 더 낮은 곳으로 시선을 주고 마음을 준다는 건 어찌 보면 판타지 같은 일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각보다 꽤 많아요. 폐지를 주워 모은 전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분도 있고, 오갈 곳 없는 사람들을 위해 사비를 들여 식사와 쉼터를 준비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만큼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길거리에 엎드려 추위를 견디는 누군가에게 주머니 속 천 원짜리를 흔쾌히 내어놓는 분도 있고, 한 달에 커피 네다섯 잔 값을 아껴 정기기부를 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무거운 짐을 든 어르신의 손이 되어드리는 분들도 있고, 몸이 불편한 분들의 도움 요청에 흔쾌히 몸과 시간을 내어주는 분들도 있지요. 그런 뉴스를 볼 때마다 ‘그래도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더불어 현재의 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내 생활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낮은 곳은커녕 주변으로도 눈을 돌리지 못했던 오늘의 나를 돌아봅니다.
고백하자면 모른 척 살고 싶을 때가 대부분입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것처럼, ‘사람이 사는 마을/가장 낮은 곳‘ 같은 곳은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외면하고 싶기도 합니다. ’내 일이 아니잖아? 내 가족의 일도 아니고. 심지어 내 친구의 일도 아니라고!’ 꽤 그럴듯한 핑계로 스스로를 설득하며 등을 돌리기 일쑤입니다. 그럼에도 자꾸 들리고 보이는 것은 제가 살아온 배경 역시 그리 윤택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펄롱‘이 세탁소에 감금된 소녀에게 더 깊은 연민과 일종의 책임감까지 느끼는 것이, 펄롱 역시 미혼모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처럼요.
물론 소설 속 ’펄롱‘과 저는 결핍 속에서도 조력자들 덕분에 꽤 안정적인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결핍이 아예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같은 결핍을 겪는 이들, 특히나 제대로 된 조력자를 만나지 못해 어쩌면 제가 겪었을 고통을 고스란히 겪고 있는 이들에게 연민을 넘어 책임감 비슷한 감정까지 느끼는 것을 보면요. 저는 펄롱만큼 용기 있고 결단력 있는 인간은 못되어, 마음만큼 행동하지 못하는 날들이 대부분입니다. ’따뜻한 함박눈‘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진눈깨비로 흩날리다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 문득 부끄럽다는 생각이 드네요.
날씨가 갑자기 너무 많이 춥습니다.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기 그지없는 날입니다. 지금도 저는 따뜻한 방에 앉은 채 글을 쓰면서, 한겨울 추위를 고스란히 견디고 있는 얼굴 모르는 이들의 그림자를 떠올리는 모순을 범하고 있습니다. 올겨울은, 진눈깨비에서 함박눈으로 한걸음이라도 나아가봐야겠습니다. 외면하고 싶은 마음을 돌려앉혀 봐야겠습니다.
이렇게 오늘도 시를 읽고, 새로운 다짐을 합니다.
*함께 읽으면 좋을 시
후라보노(허수경)
젖은 시야 안으로 들어오던
조용한 기척
등록금 받으러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는
춘천행 심야 버스였다
쏟아진 머리카락 아래로
껌 하나를
건네오는 두툼한 손이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껌을 욱여넣었다
귀밑으로 침이 고였다
껌 종이를 작게 작게 접으며 나는
후라보노 후라보노
콧물 섞인 껌을 씹었다
단물이 다 빠질 때쯤
들썩이던 어깨도 잦아들고
그 어깨 위로
무거운 音처럼 떨어지던
모르는 이의 고단함
흔들리는 시외버스
껌이 삭도록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내가 베푼 선행이란
그게 다인지 모른다
출처: <회복기>, 문학동네, 2022
*함께 읽으면 좋을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클레이 키건)
*매거진 [삶의 맛을 바꾸는 시 한 스푼]은 일주일에 한 번, 한 편의 시와 저의 단상을 엮어드리는 매거진입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시와 책도 소개해드려요. 이 매거진은 매주 주말에 발행합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