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새벽부터 침대 시트 다 버릴 정도로 많이 토했어. 새벽에 병원 접수해 놓고 왔어.“
눈을 뜨자마자 남편에게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우리 집은 남편과 첫째(아들)가 침대방에서, 나와 둘째(딸)가 매트리스만 깔려 있는 방에서 따로 잠을 잔다.) 아무리 그래도 잠귀 밝은 내가, 아들이 새벽부터 몇 차례나 토했다는데 몰랐다니?! 싱글 침대 두 개를 다 버려 시트를 다 벗겨내고, 도리가 없어서 남편과 아들이 소파에서 끌어안고 잤다는데, 내가 아무 소리도 못 듣고 잠을 잤다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자책할 여유가 없었다. 몇 차례나 토했다는 아들의 입술은 이미 새하얗게 핏기를 잃었고, 미열도 나기 시작했다. 병원 문이 열릴 시간이 되자마자 기운이 없어 꼼짝도 못 하겠다는 아이를 들쳐업고 병원 갔다.
“장염이네요. 열에 아홉은 첫날 토하고 둘째 날부터 설사하다 삼일쯤 후면 좋아져요. 아주 드문 케이스로 독감일 수도 있으니 고열이 나는지 지켜보시고, 고열이 계속되면 다시 병원에 오세요. 약은 삼일 치 드릴게요.“
“아.. 그런데 선생님, 저희가 내일부터 가족여행 일정이 잡혀 있어서요….“
“아, 그럼 약 5일 치 드릴게요. 그래도 고열이 나면 다시 오셔야 해요.”
“네…”
그랬다. 하필 내일부터 아이들이 기다리던 가족여행이었다. 모든 예약이 완료된 상황에서 아이들이 혹여라도 아플까 봐 지난 목요일부터 등원도 시키지 않고 바깥 활동도 하지 않았다. 잠깐씩 외식을 하러 나가긴 했어도 외부 사람과 접촉은 거의 없었는데, 바이러스성 장염이라니.
“그래도 오늘이라 얼마나 다행이야. 만약 내일 이랬으면 진짜 여행이고 뭐고 못 갈 뻔했으니 감사히 생각하자.“
“그래, 맞아. 오늘 하루 푹 쉬고 음식 조절하면 괜찮겠지.”
남편과 나는 오랜만에 마음을 맞춰 긍정회로를 최대한 가동했다.
병원에서 돌아온 뒤 두 아이를 최대한 떨어뜨려놓으려고 첫째는 소파에, 둘째는 멀찌감치 떨어진 거실 혹은 안방에만 머물게 했다. 첫째는 열이 나면 잠이 들었다가 열이 떨어질 만하면 깼다가를 반복했다. 다행히 고열까지는 오르지 않았지만 밤새 토하고 흰죽 조금으로 하루를 보낸 데다 열까지 났던 터라 종일 기운이 없었다. 둘째는 오빠가 너무 아파 보이니 걱정스러운지, 열시트를 가져다주기도 하고 ‘혹시 토할지도 모르니까!’ 하며 손수건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물론 가까이는
못 가서 던져주었지만..;;) 아무튼! 하루종일 붙어 노는 둘을 찢어놓았으니, 얼마나 애틋한지.
저녁나절이 되자 첫째가 기운을 좀 회복했는지 자리에 앉았다.
“엄마, 나 내일 여행 못 가면 어떡해?”
“에이, 사랑아! 퉤퉤퉤!! 해.?”
“응? 퉤퉤퉤?”
“응! 말이라도 좋게 하는 거야. 퉤퉤퉤는 방금 한 말을 무르는 주문! 엄마, 나 열심히 회복해서 여행 갈 수 있을 것 같아!라고 말해야지”
“근데 못 가면?”
“또 그런다. 사랑아, 말에는 엄청 큰 힘이 있어. 자꾸 좋은 말을 하고 바라는 바를 말하면, 진짜 이루어진다니까!”
“진짜야?“
“그럼! 당연하지. 진짜야. 말의 힘은 엄청 세서, 안 될 거야, 못할 거야, 그러면 정말 안 되고 못해져. 대신 주문처럼 잘 될 거야, 할 수 있을 거야, 꼭 이루어질 거야. 하면 진짜 할 수 있게 되고.”
“그럼 나도 바꿔 말해야겠다. 엄마, 나 내일 여행 꼭 갈 수 있을 것 같아!”
“바로 그거야!”
“근데 엄마, 엄마는 그런 걸 어디서 배웠어? 부산 할머니가 어릴 때 가르쳐줬어? “
“부산 할머니가 가르쳐주셨지. 좋은 생각을 해야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고.”
“엄마는 책 좋아하니까, 혹시 책에서 읽은 거 아니야?“
“책에서도 읽었지. 그런 이야기가 쓰인 책이 많거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면 긍정적인 결과를 얻는다!”
“책에서 말하는 거니까 진짜겠네!”
“그럼~! 근데 책에서 말해서라기보다는, 엄마가 살아보니 진짜 그래.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져.”
“좀 어려워.”
“어렵지, 아직은! 그러니까 사랑이는 다른 건 다 잊어버리고, ‘좋은 생각하고 좋은 말을 하면 말에 힘이 있어서 진짜 좋은 일이 생긴다’ 이것만 기억하면 돼.”
“알겠어. 엄마!”
한참을 “엄마, 나 내일이면 다 나을 것 같아!”, “내일 여행 갈 수 있을 것 같아!”, “근데 계속 아프면 어떡하지?”, “아, 퉤퉤퉤!”를 반복하던 첫째는 이른 잠에 들었다. 다행히 아직까진 새근새근 깊은 잠을 자는 중이다. (제발 밤새 잘자길!) 오빠와 종일 떨어져 심심해하던 둘째도 덩달아 일찍 잠이 들었다. 둘째의 숨소리 곁에서 이 글을 쓴다.
새해가 되고 계획했던 일들이 많았는데, 아이들의 방학이 계속 (자체) 연장되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1월의 절반을 보냈다. 글도 못 쓰고 책도 못 읽고 학교 일도 못하고 시간만 보내는 것 같아 가끔은 대책없이 슬퍼지기도 했다. 가족여행까지만 다녀오고서 부스터를 달고 밀린 일들을 하나하나 해내야지, 조급증을 내던 찰나. 첫째가 적절한 브레이크를 걸어준 기분이다. ‘그래, 그동안 아이들이 아프지 않고 신나게 방학을 보내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는데, 내가 또 욕심을 냈네.’ 반성한다.
오늘 첫째와 대화에서 ‘내’가 말한 것처럼, 생각도 말도 긍정적으로 해야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말했다는 게 포인트다. 말과 삶이 일치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자꾸 좋은 일이 생길 테니!
밀린 일을 못해낼까 걱정하는 대신, “다 할 수 있다! 충분히 할 수 있어!“
아이들과 24시간을 함께 하며 돌밥돌밥하는 것도 지친다 생각하는 대신, ”안 아프고 잘 노는 게 어디야! 예쁜 내 새끼들.”
왜 하필 여행 전 날에 아파서는.. 대상도 없이 원망만 하는 대신 “그래도 여행 전 날 아파서 행운이다! 열도 더 안나고 이만하면 천만다행!”
내일 무사히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염려하는 대신, ”오늘 충분히 잘 쉬었으니 내일은 꼭 즐겁게 떠날 수 있을 거야!“
긍정의 힘! 좋은 말의 힘!을 믿으며.
(미처 못 싼 짐이나 마저 싸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