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다. 새로 시작되는 해. 어제에서 오늘로, 익숙한 밤이 지났을 뿐인데도 새해라는 두 글자가 주는 힘은 대단하다. 안부를 전하기 쑥스럽던 이들에게도 새해를 빌미로 선뜻 용기를 낸다. 어제까지만 해도 할 수 없을 것 같던 일들을 새해에는 꼭 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 못한 일들, 지키지 못한 계획들로 자조하던 밤은 지고 새롭게 하고 싶은 일들, 꼭 지키겠다 다짐하는 계획들로 설레는 아침이 온다. 365일을 주기로 해가 바뀌는 일은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이 아닐까. 평생이 하나의 해로 이어져 있다면, 희망보다 절망을, 성장보다 좌절을, 기쁨보다 낙담을 경험하는 일이 훨씬 더 잦았을 테니까.
새해가 와서, 새해를 핑계 삼아 새 다이어리는 장만했다. 길들지 않아 빳빳한 다이어리를 펼치고 1월 1일 칸에 새해 소망을 썼다. 새해 계획이라고 쓰면 너무 딱딱할 것만 같아서(부담스럽기도 하고), 소망은 말 그대로 ’바라는 마음‘이니까. 새롭게 배우고 싶은 것들 몇 가지와 매일 글쓰기 등을 쓰다가 이건 또 거창한 새해 계획으로 흐르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쓰고 싶던 건 계획이 아니라 소망이었지, 되새기며 다시 칸을 채웠다.
올해는 좀 더 다정한 사람이 되었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말고, 우리 가족에게. 두 아이에게는 좀 더 다정한 엄마가, 남편에게는 좀 더 다정한 아내가.
쓰고 보니 정말 소망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아이들에게는 그래도 꽤 다정한 편인데, 남편에게는 참 잘 안된다.(저만 그런가요.) 남들에게는 한없이 다정하면서도, 막상 남편에게는 툴툴거리는 순간이 많았다. 아마 가장 가까운 이라는 생각에, 그래서 어쩌면 나의 밑바닥을 보여도 가장 안전한 사람이라는 믿음에. 남편과 나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의 원인은 대체로 남편 탓이라 치부하며 내 잘못은 최대한 작게 여기고 남편의 잘못은 최대한 부풀리면서. 올해는 좀 덜 그래봐야지. 좀 더 다정해져야지. 소망에 다짐도 덧붙였다.
아이들의 건강과 어른들의 평안 등을 몇 가지 더 쓰고 보니, 소망대로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한 해가 되겠다 싶었다. 어제와 오늘 사이를 가르는 건 겨우 시곗바늘 한 칸인데, 이토록 갑작스럽게 새로운 마음이 드는 것이 참 신기했다.
“언니야, 우주 새해 소망이 뭔지 아나?”
저녁 시간쯤 동생에게서 카톡이 왔다. (우주는 우리 집 둘째와 나이가 같은, 다섯 살 조카이다.) 표현력이 뛰어나 자주 우리를 놀라게 하는 아이라 이어질 동생의 답이 궁금했다.
“우주는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게 소원이래.”
다섯 살짜리 아이의 소망이라기엔 꽤 노숙한 답에 웃음이 났다. 새해 소망으로 건강을 기원하는 건 사십 대가 되면서부터였는데, 겨우 다섯 해를 산 아이가 벌써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니! 맞다. 사실 건강한 게 최고다. 몸도 마음도 건강하다면 어떤 일도 해낼 기회가 있고, 해낼 힘을 낼 수 있으니까. 가장 중요한 소망은 건강이지!
잠자리에 누워 두 아이에게도 새해 소망을 물었다.
(엄마) “사랑아, 봄아. 너희는 새해 소망이 뭐야?”
(둘째) “소망이 뭐야?”
(첫째) “바라는 거지.“
(엄마) ”그래, 바라는 거. 새해가 됐으니까 뭔가 바라는 게 있어?“
(둘째) ”산타 할아버지한테 바라는 것 같은 거야?“
(엄마) “아니, 뭘 갖고 싶은 거보다, 올해 일 년 동안 이루어졌으면 좋겠는 일이 있냐는 거지.”
(첫째) 엄마, 나부터 말할게. 나는 올해 초등학교 가니까, 친한 친구들이랑 같은 반 됐으면 좋겠어. 그래서 학교 잘 다니고 싶어.
(엄마) 그래, 우리 사랑이한테는 올해 진짜 큰 변화가 있지. 유치원과 학교는 진짜 다를 거야. 엄마도 사랑이가 학교에 잘 적응해서 무사히 일 년을 잘 보냈으면 하는 소망이 있어. 봄이는?
(둘째) 엄마, 나는 음… 행복하게 지내고, 편안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새로운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엄마) 맞다. 봄아. 그게 정말 중요하지. 행복하고 편안한 거. 우리 봄이도 어린이집에서 유치원에 가니까 적응을 해야 하는데, 행복하고 편안하면 정말 좋겠다. 엄마도 같은 소망!
(첫째) 엄마는? 사랑이랑 봄이랑 건강하게 오래오래 지내는 거지?
(엄마) 응, 맞지. 그게 언제나 가장 큰 소망이고, 올해는 하나 더 있어.
(첫째) 뭐야?
(엄마) 올해는 사랑이 봄이한테 좀 더 다정한 엄마가 되고 싶어. 아빠한테도 다정한 아내가 되고 싶고.
(첫째) 우리 소망이 다 이루어지면 좋겠네.
(둘째) 그럼 행복하겠다!
새해 소망을 재잘거리던 아이들이 잠 든 밤. 아이들과 나의 소망을 기록하는 글을 쓴다. 우리의 소망이 ‘바라는 마음’에서 그치지 않고, ‘이루어진 꿈’이 되기를 고대한다. 일 년이 지나, 다시 한 해가 저물 때쯤 이 글을 꺼내 읽으며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졌다고, 올 한 해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대체로 행복하고 편안했다고 회고할 수 있었으면.
새해 소망을 기록하는 일은 소망하는 일의 방향으로 나아가겠다는 선언이자, 몸과 마음의 방향을 소망하는 곳으로 바로 세우겠다는 다짐이다. 이제 겨우 새해의 두 번째 밤이다. 남은 360여 일이 어느 방향으로 흐르게 할지, 나침반을 세우기 더없이 좋은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