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아 Jun 04. 2024

나아질 거예요.

TO. 밀라노     


작가님, 밀라노로 보내는 첫 편지입니다. 며칠 전 발행된 작가님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어요. 작가님과 다시 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내 마음이 뭉근하게 끓어오른 시간이었습니다.


6월이 왔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작가님의 문장을 짚으며 이제야 달력을 넘겨봅니다. 그렇네요. 정말 한 해의 절반이 이렇게 속절없이 흘러갑니다.


저는 첫째를 초등학교에 보낸다는 이유로 다시 휴직을 한 지, 이제 4개월 차에 접어듭니다. 사실 이번 휴직은 휴직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깊이 고민하지 못한 채 상황에 떠밀려 한 휴직이에요. 조금 무리를 했더라면 휴직을 하지 않고도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결정을 하던 때만 하더라도 엄마로서의 책임감이 너무나 무거워 다른 방법을 찾을 마음을 먹지 못했어요. 그래도 내가 할 수 있을 때 아이 곁에 있어주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쫓겨 급하게 결정한 휴직이다 보니 지난달 말까지는 괜히 좀 힘들었어요. 초등 휴직은 엄마에겐 휴식이기도 하다던데, 그걸 전혀 누리지 못하고 매일 ‘휴직하지 말걸.’, ‘어떻게 한 복직인데, 힘들어도 계속 일할걸.’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엄마로서의 자아가 발동하여 휴직을 결정했지만, 오랜만에 누려본 직업인으로서의 자아를 잃는다는 게 두려웠던 것 같아요.


그뿐이었다면, 그 정도의 이유였다면 휴직으로 여유로워진 생활 속에서 금방 괜찮아졌을 것도 같아요. 생각보다 아이는 잘 적응해 주었고, 제 손이 필요하긴 했지만 틈틈이 저를 위한 시간을 쓸 수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금방 괜찮아지지 않았던 건,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여러 아픔들이었어요.


2월 말부터 5월까지 무척 자주, 심지어 많이 아팠습니다. 우선 몸이요. 마치 '너 지금껏 나를 함부로 써왔지? 한 번 호되게 당해봐라!' 하는 것처럼, 몸 곳곳에서 이상신호가 울렸어요. 커피도 끊고, 저녁이면 간간이 마시던 맥주도 끊고, 필라테스도 다니고, 꽤 규칙적인 생활도 했는데 소용이 없더라고요. 한 달에 두어 번은 링거를 맞아야만 버틸 수 있는 지독한 몸살에 걸렸어요. 고질적이던 허리 통증도 날로 심해져 서 있기도 힘든 날들이 이어졌고요. 손가락과 손목 근육도 많이 상해서 워드 작업도 어려웠고, 어깨도 너무 자주 뭉쳐 잦은 두통에 진통제 없이 잠들기 어려운 밤도 많았습니다.


몸만 그랬다면 어찌어찌 약으로도 버텼을 텐데, 더 큰 문제는 마음에서 왔습니다.


마음이 자주 무너져 내렸어요. 관계에서 오는 오래 묵은 갈등들이 모두 수면 위로 떠올랐고,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해 우두망찰 한 날들이 많았어요. 괜찮은 듯하다가 갑자기 확 우울해졌고, 한 번 우울감이 몰려오면 통제가 힘들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무엇 때문에 이렇게 우울한지 그 이유는 아득해지고, 그저 우울하다는 감각만 선명한 순간들이 많아지더군요. 정말 가끔은, 아득한 아래가 내려다보이는 집 베란다 창문에 기대어 ‘아, 그만 우울하고 싶다’라는 무서운 생각을 하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저를 정말로 힘들게 했던 건, 우울한 마음 자체가 아니었어요. 우울한 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저 자신이었어요. 그렇게 깊은 우울을 겪으면서도 사람들을 만나면 웃고 떠드느라 얼마 남지 않은 에너지를 쥐어짜는 저를 발견했어요. 우울하다는 것을 인지하면, '아, 지금 내가 힘들구나' 생각하는 대신 '왜 우울하지? 내가 지금 우울할 이유가 없는데?'라며 제 감정을 무시했어요. 누구에게도 그 우울감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오히려 겉을 더 가꾸기도 하고, 더 씩씩한 척 이 일 저 일에 매달리기도 했어요. 그러다 못 견디겠다 싶은 어느 날이면 가까운 이들에게 우울감을 고백하다가도, 끝내는 '뭐, 그래도 괜찮지! 이만하면 괜찮아! 에이, 다 괜찮아지겠지!'라며 별거 아닌 감정인양 우울을 외면했어요.


우울이라는 걸 감출 수 있나, 싶지만 제 경우에는 감춰지더라고요. 때론 극도의 밝음으로, 때론 극도의 냉담함으로 저를 포장해서 제가 우울하다는 걸 누구도 몰랐음 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우울은 잦아들지 않고, 도리어 혼자 있는 시간이면 지하 수백 킬로 미터 아래로 침잠하는 기분에 사로잡혔어요. 혼자인 시간을 버티지 못하는 밤이면 베란다 창문에 기대앉아 오랫동안 어둠을 바라보았어요.


그러는 와중에도 하루하루 해야 할 일은 루틴처럼 정확하고도 분명하게 돌아오더군요. 일어나지 않으려는 몸과 마음을 일으키는 건 아이들의 목소리였습니다. 아이들 목소리에 이끌려 아침을 차리고 설거지를 했어요. 아이들을 학교와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나면 집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하루에 5Km 이상을 걸었습니다. 영 괴로운 날에는 10Km를 훌쩍 넘기도 했지요. 걷고 또 걷다가 종아리와 발바닥이 너무 아파 더는 걷기 어려울 지경이 되면 집으로 가 땀에 젖은 몸을 씻었어요. 그러고 나면 희한하게 허기가 지더군요. 그럼 또 꾸역꾸역 뭔가를 먹었어요. 잠깐의 여백도 견디기가 어려워서 곧장 몸을 일으켜 설거지를 하고, 남은 시간 동안  책을 읽고 필사를 했어요. 그러다 보면 첫째 아이의 하교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이와 함께 놀이터에 가서 두 시간쯤 보내고 나면 둘째 아이가 하원을 했어요. 그럼 또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 하고, 아이들의 숙제를 챙기다 보면 아이들이 하품을 하고,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저도 기진맥진해서 잠을 자야 했어요.


몸도 성하지 않았는데, 마음이 더 고단하니 몸을 많이 혹사시켰던 것 같아요. 그래도 몸에는 약도 줄 수 있고 링거도 맞혀줄 수 있었으니까요. 몸이 아픈 건 숨길 수 없으니 주변 사람들의 위로와 위안도 부담 없이 누릴 수 있었고요.


음, 지금은 어느 정도 회복되었는지 궁금하실 것 같아요. 참 아이러니한데, 몸을 혹사시키는 동안 오히려 몸이 많이 건강해졌어요. 우울을 이기려고 내디뎠던 걸음이 꽤 많은 운동이 된 것 같아요. 자꾸만 체하고 배가 아파서 몸에 나쁜 음식들을 멀리했는데 그러다 보니 속도 많이 편해졌어요. 뭐라도 하자 싶어 시작한 필라테스 덕분에 허리 통증도 좀 잦아들었습니다. 정말 희한한 건 몸의 통증이 잦아들자 마음도 좀 버틸만해졌다는 거예요. 몸과 마음, 두 녀석이 얼마나 긴밀하게 닿아 있는지 몸소 깨달은 시간이었다고 할까요. 그리고 그 사이에 기적처럼, 묵은 갈등들이 조금씩 실마리를 찾아갔고 아주 약간은 해결이 되기도 했어요.


이 모든 일들이 지난 서너 달 동안 일어난 일이라니,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어요. 정말 긴 시간처럼 느껴졌는데, 지나고 보니 겨우 서너 달 흘렀을 뿐이네요. 작가님은 지난 편지에서 시간이 정말 빠르다고 하셨지요. 저는 지난 몇 달이 너무도 느리게 흘러서인지, 이제 겨우 6월인가 싶습니다. 시간은 참으로 상대적이지요?

    

저는 요즘 매일을 아주 규칙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아침을 챙기며 함께 아침을 먹습니다. 차례로 등교와 등원을 시키고 나면 매일 한 시간 이상을 걸어요. 요즘 한국도 아침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거든요. 하늘도 쨍하고 공기는 또 얼마나 좋은지! 걷기에 더할 나위 없는 날들이에요.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나를 더 아껴주자 다짐합니다. 우울감이 밀려오는 날이면 좀 더 짙은 숲을 찾아 걸어요. 나는 누구에게도 기대지 못하는 성격임을 그냥 받아들이기로 해요. 내가 나에게 기댈 수 있도록, 나를 더 단단하게 키워보자 마음먹어요.


집에 돌아와서는 원고 작업을 해요. 아무리 붙들고 있어도 한 단어도 쓸 수 없을 때면 과감하게 노트북을 덮고 소설을 읽습니다. 나와 다른 삶을 사는 이들을 만나고, 나와 비슷한 삶을 사는 이들을 만나며 여러 삶을 꿈꿔보기도 해요. 아이들이 돌아오기 한 시간 전이면 미리 저녁 식사를 준비합니다. 집밥을 하는 일이 고되기도 하지만, 그게 또 엄마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것 같아 묘한 위로가 되더라고요. 아이들이 하교, 하원을 하면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게 합니다. 엄마 휴직 찬스를 제대로 누리는 두 아이는 학원도 다니지 않고 학습지도 하지 않고 말간 햇빛에 살을 그을려 가며 신나게 놉니다.


집에 돌아와 씻고 나온 아이들과 퇴근한 남편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둔 저녁 식사를 차리고, 저는 다시 운동을 나섭니다. 다시 또 걷고, 걸어요. 아파트 커뮤니티에 있는 사우나에 들러 깨끗이 씻고 씩씩한 마음이 되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빨래를 하거나 청소기를 돌리며 남은 저녁 시간을 보낸 뒤, 두 아이를 양쪽에 앉혀두고 책을 읽어줍니다. 두 아이가 모두 잠들고 나면 아홉 시 반쯤. 다시 몸을 일으켜 골방에 숨어듭니다. 그리고 시집을 읽고 필사를 해요.


얼마 전에 만년필 하나를 선물 받았는데 만년필로 필사를 하는 게 꽤 특별한 느낌을 주더라고요. 사각사각 잉크 번지를 소리를 들으며 필사를 하다 보면 많은 일들이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희한하게 만년필 필사를 하고 있으면 지난 일들이 자주 떠오르는데, 아무래도 만년필의 필기감이 주는 아날로그적인 느낌 때문이 아닐까 해요. 아무튼 그렇게 몇 편의 시를 필사하고, 낮에 다 읽지 못한 소설을 읽다 보면 종일 분주하게 움직인 덕분인지 졸음이 쏟아집니다.


요즘 들어 매일이 똑같은 것 같아도, 매일을 다르게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어제보다 나아지기도 하고, 어제보다 못해지기도 하지만 그런대로 저에게 조금씩 너그러워지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가끔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우울이 들이닥치지만, 저는 또 나아질 거고 나아갈 거니까. 그런 저를 막연하게나마 믿어보려고 해요.      


첫 편지가 너무 우울했던 것 같아요. 사실 못다 한 말들이 더 많지만. 이 편지는 풀칠하지 않은 봉투에 넣을 예정이니 여기까지만 말하려고요. 남은 이야기들은 우리가 마주하는 어느 날에, 다 지나간 이야기처럼 털어놓을게요. 그때까지, 작가님의 몸과 마음이 무탈하시고 평안하시기를. 더불어 저의 몸과 마음도 그러하기를.


From. 대구

매거진의 이전글 줌 자동결제를 중단했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