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은 어린 시절, 같이 횡단보도를 건너던 아빠가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당시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중 누구도 쓰러진 아빠를 도와주지 않았다. 구경거리가 생긴 듯 무심한 시선만 던질 뿐. 그들의 시선은 율에게 깊은 상처이자 트라우마가 되었다. 율은 세상을 믿지 않고 사람을 믿지 않게 되었다. 누군가와 시선을 마주치는 일을 거부하고 그 대신 상대의 발을 바라보는 일에 익숙해졌다.
소설은 율의 시선이 발에서 하늘로, 끝내는 상대와 눈을 마주치는 것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율은 저마다의 아픔을 지닌 친구들-서진욱, 이도해-의 숨은 사정을 알아가며, 그들과 진정한 소통을 하게 되고 진짜 관계를 맺게 된다. 우연인 듯 이어지는 여러 사건들을 함께 겪어가며 율은 친구들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건네기도 하고, 걱정과 염려를 전하기도 한다. 그러는 사이 차츰 율의 시선이 옮겨지고, 율과 친구들은 자신을 속박하던 아픔들에서 조금씩 벗어나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인다.
청소년 소설답게 성장소설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부모의 죽음으로 인한 상처, 무관심한 부모에게 받은 상처, 방치와 학대를 일삼는 부모에게 입은 상처를 지닌 인물들이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의 삶에 손을 내밀어가며 나아가는 모습에 자주 울컥했다. 그나마 주인공 율에게는 심리적 기반이 되어주는 엄마가 있었지만, 진욱과 도해에게는 누구도 없었는데 그게 참 아팠다. 어른으로서, 누구도 그들의 아픔에 개입하고 그들의 아픔을 품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 슬펐다. 현실에는 얼마나 많은 진욱과 도해가 있을까. 내가 만난, 만날 아이들 중에도 진욱과 도해 같은 아이들이 있었고, 있을 테지.
교사로서 청소년 소설을 읽다 보면 여러 모로 마음이 저린 순간이 많다. 겹쳐 보이는 아이들이 지금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놓친 아이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기도 한다. 아무쪼록 율이, 진욱이, 도해가 더 나아지기를 바란다. 더 방황하더라도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마음을 잊지 않으며 끝내는 더 많이 웃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눅눅한 냄새가 나는 잿빛 계단 아래. 빛도 들지 않는 구석, 지금 우리가 대화하고 있는 곳. 하지만 이도해에게는 시궁창도 낭만적인 단어가 될 것 같았다. 나는 이도해의 까만 눈동자를 몰래 힐끔거렸다. 난생처음 타인의 시선이 궁금해졌다. 저 눈에는 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120쪽)
그래, 서진욱은 간절했다. 그래서 지금 내게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다만 내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깔끔하게 미련을 버리게 해 주어야 하는지, 아니면 무조건적인 희망을 주어야 하는지. 엄 마라면 어떻게 말해 줬을까, 이도해라면•••••• 아니, 아니다. 나는 서진욱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나도 모르지."
내 입에서 튀어나온 건 위로도 격려도 아니었다. '모른다.'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말. 어쩔 수 없다. 나는 어중간한 사람이니까.
"아무것도 못 할지 아니면 무언가를 해낼지는 전부 너한테 달렸으니까."(143쪽)
"근데 가족이 있어서 행복한 게 아니라 불행한 경우도 있어. 세상에는 자기밖에 모르는 부모도 있다고. 그런 부모에게 자식은 그저 부산물에 불과하지. 남남인 거야. 근데 진짜 불공평한 게 뭔지 알아?"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가을의 서늘한 밤바람에 서진욱의 혼 잣말이 실려 왔다.
"자식에게 부모는 세계야. 싫어도 애정을 갈구하게 되는 세계."
서진욱은 이도해의 무언가를 이해하고 있었다. 이도해와는 말 몇 마디 나눈 적 없는 사이라고 했는데, 나는 이해하지 못했던 이도해의 중요한 무언가를 서진욱은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사고가 났다. 심장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194쪽)
"너도 멈춰 있기보다는 나아가렴. 네가 그 친구를 찾을 수 없다 면 그 친구가 너를 찾을 수 있게 해. 누구나 널 알아볼 수 있도록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거야."
“....... 걔는 나아가지 못하면?"
"다시 나아갈 수 있도록 마음이 쉴 곳을 만들어 줘야지. 그게 어른이 해야 하는 일이야."
엄마가 현관문을 열며 읊조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나는 그 소리에 담긴 무게를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렇게 무거운 것을 짊어진 엄마는 강했다. 강하다는 건 누군가를 이용하고 이득을 취하거나 무감각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진정으로 강한 것은 그럼에도 나아가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방안을 꽉 메우고 있던 텁텁한 공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엄마와 나는 쓰레기 봉지를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녹색 쓰레기통에 봉지를 집어던졌다. 무감각했던 과거의 나 자신도 함께.(206-207)
인간은 나약하다. 너무 쉽게 부서지고 무너진다.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고 자신을 숨기며 끊임없이 상처를 입는다. 하지만 그렇게 부서지고 무너지면서 강인해진다. 모순적이었다.
모순적이기에 인간은, 삶은 매력적인 것이었다.(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