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소설은 슬프다. 아프고 아린다. 읽고 싶지 않지만 멈출 수도 없다.
이 소설은 서술자가 아주 독특하다. 바로 ‘행운’이다. ‘행운’은 소설의 중심인물인 우영과 형수, 은재와 지유(주로는 우영과 형수)의 뒤를 쫓으며 그들 삶의 수호신이 된다. 수호신이 있는 삶이라면 꽤 행복하고 자주 기꺼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행운은 그들이 간절히 열망할 때, 그들의 삶이 바닥까지 내동댕이 쳐졌음에도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지 않을 때 슬쩍 고개를 내밀 뿐이다. 결국 행운은 그들 삶을 바꾸지 못한다. 그들 삶은 그들이 스스로 바꾸어 나간다. 서로 연대하여.
행운의 도움이 가장 필요한 인물은 은재와 우영이다. 은재는 아빠에게 지속적인 폭력과 학대를 당하고 있다. 여러 번의 신고와 구조 요청을 보냈으나 누구도 은재를 제대로 살피거나 도와주지 않았다. 은재는 더 이상 세상을 믿지 않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다. 우영은 엄마에게 지속적인 정서 폭력을 당하고 있다. 사실 우영의 엄마가 하는 말들은 너무나 일상적이고 평범해보이기도 해서, 누군가는 부모가 그 정도 말도 하지 못하냐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를테면 “네 정신머리가 그따위니까 성적이 그따위인 거야!”, “하루 종일 게임하고 싸돌아다니는 것 말고 네가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어?”, “너한테 전교 1등을 바라냐, 그저 학원이나 다니면서 시키는 공부나 하라는 거 아냐.” 같은 말들. 부모라는 이유로, 너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이유로 내뱉는 말들이 때론 아이의 자존감을 산산조각 내고, 겉으로 보이지 않아 알 수 없는 치명적인 내상을 입힌다. 그렇다면 그건 명백한 정서적 폭력이다.
은재와 우영이 학대와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특별하거나 대단한 ‘행운’ 때문이 아니다. 우영에게는 지유(반장)의 관심과 애정 어린 말들이 큰 힘이 된다. 지유가 던지는 ‘아침밥은 먹었냐’라는 무심한 질문과 딸기 우유 한 통이 우영의 마음을 살피고 잃었던 자존감을 회복하게 한다. 누군가에게는 자신도 꽤 괜찮은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는 믿음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으로 발전한다. 은재에게는 좀 더 큰 힘이 필요한데, 우영, 지유, 형수가 그 역할을 한다. 아빠의 폭력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리던 은재는 축구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거기서 만난 친구들 역시 은재에게 큰 울타리가 된다.
끝내 아빠의 폭력을 멈출 수는 없었지만 은재는 세상을 믿어보기로 누군가에게 도와달라고 말해보기로 결심하는데, 그게 너무 대견하면서도 너무 아득했다. 그 오랜 세월 온몸으로 품고 있던 상처와 흉터들을 처음 내어 보이던 은재의 마음은 어땠을까. 스스로가 가여웠을까, 그렇게 만든 아빠를 원망했을까, 그럴 수 있는 용기를 준 친구들에게 고마웠을까, 앞으로 일어날 일이 두려웠을까. 아마 그 모든 감정들이 소용돌이쳤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재는 발을 내디뎠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행운’은 말한다. ‘행운이 너에게 다가가는 중’이라고.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한참 동안 책을 안고 있었다. 은재를 안아주는 마음으로. 이런 이야기가 기분 나쁜 판타지로 읽히는 날이 왔으면, 학대와 폭력이라는 단어가 국어사전에만 존재하는 사어가 되었으면. 그런 비현실적인 상상을 하면서 한참 동안 책을 품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그뿐이라서. 책을 안고 우는 일뿐이라서.
여전히 학대와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이 너무 많다. 그 아이들에게는 은재의 사연이 더 판타지 같을 것이다. ‘작가의 말’에서 이꽃님 작가님도 ‘이 소설의 결말이 판타지’라는 이야기를 들으셨다고 고백하셨다. 정말이다. 그런 상황에 놓인 아이에게 손을 내밀고, 돕기를 주저하지 않는 마음을 먹는 것 자체가 판타지가 되어버린 세상. 이 세상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하는 나는 고민이 깊어진다. 내게 올 아이들 중 은재가 있다면, 나는 그 아이를 어떻게 품어야 하는가. 닫힌 마음을 어떻게 열게 하고 아리고 쓰린 삶을 어떻게 보듬어야 하는가.
내가 관심 있게 지켜보는 이들은 이런 사람들이다.
인생이 마구 장난을 쳐 대는데도 견디는 방법밖에 모르는 사람들. 인생에게 걷어차여 정신을 못 차리면서도 절대 물러서지 않는 사람들. 어떻게 해서든 인생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게 만들고 싶은 사람들.
이들이야말로 내가 존재하는 이유다. (12쪽)
지옥불에서 누군가 당신에게 도와 달라고, 살려 달라고 손을 내밀면 당신은 그것을 맞잡을 용기가 있을까. 손을 잡으면 같이 지옥불에 휩쓸리고 말 것이다. 꼭 그럴 것만 같다. 이게 지옥에 사는 사람들이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다.( 45쪽)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들은 시간이 흘러 비겁한 어른이 된다. 그렇게 또 다른 이름을 하고 또 다른 모습을 한 수많은 은재를 못 본 척하고 눈을 감으며 내 앞가림이나 잘하자고 생각할 것이다. 폭력 앞에서 창문을 닫던 누군가처럼,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해 왔던 매년 새로운 담임 선생님들처럼.
나는 두 녀석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그리고 나는 언제고 아직 비겁해지는 법을 배우지 못한 두 녀석의 인생에 타이밍이 되고, 운이 되고, 행운의 여신이 되어 줄 생각이다. 녀석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겠지만 상관없다.
인생은 길다.(88쪽)
그렇게 소년은 부모에게서 배우지 못한 사랑하는 법을, 사랑받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105쪽)
인생은 불공평하지만, 불공평한 인생에 손을 내밀어 주는 건 언제나 다시 인간들이다.(182쪽)
소녀는 그렇게 더는 죽지 않고 살아가기로, 진짜 삶을 살아가기로 마음먹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진짜 삶을 살아가기로 한 소녀의 삶에 구원이 되어 줄 것이다.(193쪽)
나는 녀석들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작게 속삭인다.
지금 행운이 다가오는 중이라고.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보라고.(197쪽)